지난해 11월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국제게임박람회 지스타 현장. /사진=임한별 기자

세계보건기구(WHO)가 오는 5월 열리는 국제질병분류기호개정(ICD-11)에서 게임장애의 질병코드 도입을 검토 중이라고 밝히면서 게임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ICD는 세계 각국의 사망 및 질병 통계에 사용되는 분류로 현재 쓰이는 최신판인 ICD-10은 1990년 5월 세계보건총회에서 43개 국가가 승인, 1994년부터 회원국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28년 만에 개정되는 ICD-11에 게임장애가 질병코드로 등재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게임업계는 즉각 반발했다.

◆게임장애 소식에 업계 반발

지난달 19일 한국게임산업협회,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한국모바일게임협회 등 주요 게임관련 단체가 성명을 내고 게임질병 등재 움직임에 강력 반대했다. 이어 지난 1일 미국 ESA, 브라질 BUVG, 캐나다 ESAC, 남아프리카공화국 IESA, 호주 및 뉴질랜드 IGEA 등 세계 각국 게임협회와 협력해 대응한다는 방침도 내놨다.


강신철 한국게임산업협회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고 증명된 바가 없음에도 게임장애를 질환으로 분류하려는 WHO의 계획에 전세계가 반발하고 있다”며 “WHO의 게임장애 분류시도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한 만큼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게임업계를 넘어 정신의학 및 심리학 전문가도 게임질병 등재에 우려를 표했다. 지난 9일 국립중앙도서관 국제회의장에서는 ‘게임문화의 올바른 정착을 모색하기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자리에 참석한 한덕현 중앙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게임중독은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에서 정식 질환으로 인정되지 못했다”며 “내성과 금단증상 등이 수반돼야 중독으로 인정할 수 있는데 게임중독은 이 부분이 규명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질환으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해당 기준에 너무 많은 이가 적용되면 안된다. 가령 100명 중 33명이 진단기준상 질환이라면 이는 병이 아니라 트렌드”라고 덧붙였다.


윤태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는 게임질병화는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포비아, 일종의 공포라고 규정했다.

윤 교수는 “1800년대 초 유럽에서 대중소설이 인기를 끌자 신문이 이를 비판하고 1970년대 텔레비전이 등장하자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었다”며 “2000년대 초에는 신문과 TV가 힘을 합쳐 인터넷의 부작용을 비판했다. 앞으로는 유튜브가 게임보다 더 많은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의학계도 결론 못 내린 게임장애

게임장애에 관한 논란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4년 당시 보건복지부는 게임중독법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듬해인 2015년에는 게임중독의 위험성을 알리는 공익광고를 제작해 논란을 빚었다. 해당 광고에서는 ‘게이머’를 ‘중독자’로 묘사하고 게임과 다를 바 없는 여가활동을 게임보다 우월한 취미활동으로 그렸다. 논란이 계속되자 복지부는 당시 문화체육부와 조율 끝에 광고 송출을 중단했다.

문제는 이번 WHO의 질병 등재에 맞춰 이런 움직임이 되풀이된다는 데 있다. 한국은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하는 ICD를 골격으로 국내 실정에 맞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를 제정한다.

현재 KCD는 2016년부터 7차 개정판을 사용하고 있는데 만약 ICD의 초안 그대로 게임장애가 ICD-11에 추가될 경우 KCD 8차 개정안에는 게임장애 항목이 그대로 등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WHO의 원안은 게임장애를 ‘다른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우선순위에 둬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게임을 지속하거나 확대하는 게임행위의 패턴을 12개월 동안 지속해야한다’고 정의한다. 업계는 ‘부정적인 결과’라는 단어가 모호한 표현이라고 지적한다.

업계 관계자는 “명확한 기준 없이 진단을 내리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중독자 혹은 질병보유자 낙인이 찍힐 수 있다”고 꼬집었다.

게임장애의 임상적인 설명만 포함됐을 뿐 해당 질환의 예방·치료 및 재활에 관한 어떤 기준도 제시하지 않는 점도 문제다.

그레고리 하틀 WHO 대변인은 “(게임장애는) 임상적인 설명만 포함됐을 뿐 예방이나 치료를 위한 옵션은 담겨있지 않다”며 “질병으로 게임장애를 분류해 각 국가가 해당 질환의 예방·치료 및 재활을 위한 보건 의료와 자원 배분을 돕는 것이 취지”라고 설명했다.

세계 각국 전문의들은 ICD-11 초안에 게임장애 항목을 추가한 것을 두고 “매우 성급한 결정”이라고 꼬집었다. 크리스 퍼거슨 미국 스테슨대학 정신의학과 교수는 “게임분야의 합의가 반영되지 않았다”며 “의학계에서도 게임과 관련해 어떤 결론도 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2017년 장르별 콘텐츠 수출 비중. /자료=한국콘텐츠진흥원

◆게임강국에서 마약수출국으로

오는 5월 게임장애가 질병 목록에 등재되면 한국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장 먼저 세금 부과를 꼽을 수 있다. 내국인 대상 카지노인 강원랜드는 매년 순매출의 5~6%를 공익사업비로 납부한다. 술에 부과되는 ‘주세’, 담배에 부과되는 ‘국민건강증진기금’처럼 게임에도 별도의 부담금이 책정돼 ‘게임중독자’ 예방·치료지원 등을 위해 사용된다.
더 큰 문제는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추락이다. 게임은 현재 국내 콘텐츠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큰 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영화수출액은 4718만달러인 반면 게임수출액은 37억6092만달러로 80배에 가깝다. 펍지주식회사의 배틀그라운드, 넥슨의 던전앤파이터, 스마일게이트의 크로스파이어 등은 대표적인 효자상품이다.

하지만 게임장애가 현실화되면 한국은 중독 유발물질을 수출하는 국가로 전락, 경제는 물론 대외이미지에도 타격을 입는다. 게임개발자들은 마약제조상으로 낙인찍히고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 중인 4차 산업혁명 관련 테스트베드 기반이 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정부는 게임장애 등재 이후의 긍정적인 효과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WHO가 게임장애를 질병으로 규정한다면 우리나라에서도 게임장애에 대한 인식이 바뀔 것”이라며 “게임 중독으로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를 고려했을 때 체계적인 치료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32호(2018년 3월21~27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