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로 유명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신에 관하여』는 디지털문명 비판서이다. 그는 아날로그문명이 마음에 각인되는 것이라면 디지털문명은 마음에 미끄러지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신에 관하여』의 핵심 키워드는 주의(Attention)인데 단순한 집중력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열림이다. 신을 체험하는 것은 인식론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건이다. 자아의 경계가 무너지고, 전적으로 타자를 향해 열릴 때 신적 체험은 발생한다. 그는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가톨릭 신비주의자인 시몬 베유(Simone Weil)를 인용한다.
"기도는 순수한 주의다."
베유에게 기도는 언어가 아니라 방향성이다. 자아를 비우고 신을 향해 온전히 돌아서는 것. 한병철은 이 전통 위에서 디지털문명을 비판한다. 그가 말하는 디지털문명의 주의 구조 해체에 대한 논거는 5가지이다.
첫째, 정보 과잉이 침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신적 체험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침묵과 공백 속에서 일어났다. 엘리야는 광야에서, 모세는 호렙산에서, 예수는 광야 40일에서 신을 만났다. 한병철은 디지털 환경이 이 공백 자체를 소멸시킨다고 본다. 스마트폰 알림, SNS 피드, 유튜브 알고리즘 등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존재론적 공백의 봉쇄'다. 침묵이 없으면 신의 목소리가 들어올 틈도 없다. 디지털 문명은 24시간 소음을 생산함으로써 신학적 의미의 '광야'를 인류의 삶에서 추방한다.
둘째, 클릭 경제가 주의를 파편화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자본주의는 '주의 경제(Attention Economy)'를 작동시킨다. 플랫폼은 사용자의 주의를 상품화하여 광고주에게 판다. 이 구조에서 플랫폼의 이익은 사용자의 주의를 최대한 짧게, 자주, 자극적으로 분산시키는 것이다. 한병철은 이것이 주의의 구조적 왜곡이라고 본다. 신에 대한 주의는 길고, 느리고, 비생산적이며, 비자극적이다. 그것은 클릭을 생산하지 않는다. 따라서 알고리즘은 그것을 체계적으로 억압한다. 시장이 신적 체험을 구조적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셋째, 나르시시즘적 자아가 타자를 차단한다는 것이다.
한병철의 이전 저작 '피로사회', '투명사회'의 연장선에서, 그는 디지털문명이 '나르시시즘적 주체'를 생산한다고 진단한다. SNS는 자기 전시의 공간이며, 알고리즘은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확인해주는 콘텐츠만 선별 제공한다. 이른바 필터 버블이다. 이 구조에서 자아는 '타자의 침입'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신의 체험은 본질적으로 레비나스적 의미의 '타자 경험' 이다. 자아를 완전히 압도하고 뒤흔드는 절대적 타자와의 만남이다. 자아에 갇힌 주체는 신을 만날 수 없다. 디지털 문명은 자아를 봉인함으로써 신의 접근로를 차단한다는 것이다.
넷째, 투명성의 강박이 신비를 소멸시킨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현대 디지털 사회를 '투명 사회'로 규정한다. 모든 것이 데이터화되고, 수치화되고, 공개되어야 한다는 강박. 프라이버시는 의심받고, 비밀은 비효율로 간주된다. 그러나 신은 본질적으로 '감추어진 존재'다. 욥기의 신은 설명되지 않으며, 이사야 45장의 신은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다. 신비는 투명성의 반대편에 있다. 모든 것을 측정하고 가시화하려는 디지털 문화는 신비를 용납하지 않는다. 신비가 사라진 자리에 신도 사라진다.
다섯째, 즉각성의 문화가 기다림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문명의 시간성은 '즉각성(Immediacy)'이다. 검색은 0.3초 안에 답을 내놓고, 배달은 한 시간 안에 음식을 가져오며, 넷플릭스는 다음 회를 자동으로 재생한다. 기다림은 버그이며, 지연은 실패다.
그러나 신 체험의 시간성은 정반대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 주를 기다림이여"라고 노래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두운 밤'의 긴 침묵 속에서 신을 만났다. 기다림, 인내, 비움, 이것이 신비주의 전통의 공통 문법이다. 즉각성의 문화는 이 시간적 구조 자체를 해체함으로써 신 체험의 가능성을 소거한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디지털문명을 단순히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처방은 '주의의 신학적 회복'이다. 속도를 늦추는 것, 침묵을 되찾는 것, 나르시시즘적 자아에서 타자를 향해 열리는 것, 이것이 단순한 디지털 디톡스가 아니라 '존재론적 회심'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한병철의 분석은 탁월하지만 두 가지 질문을 남긴다.
첫째, 디지털 이전에도 주의의 분산은 존재했다. 산업화된 도시, 신문, 라디오도 침묵을 빼앗았다. 디지털이 새로운 종류의 위협인지, 아니면 오래된 위협의 강화인지는 더 논의가 필요하다. 물론 디지털이전의 미디어와 디지털이후의 미디어는 인간 주의의 파편적 분산과 속도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둘째, 기독교 신학은 신이 인간의 주의의 질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소음 속에서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광야뿐 아니라 시장터에서도, 세리의 집에서도 주의는 신의 조건이 아니라 인간의 수용 태도의 문제다. 한병철은 신학적으로 신을 인간의 주의에 너무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는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그의 경고는 유효하다.
"우리가 듣지 않을 때, 신은 침묵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다. 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신을 대면할 수 있는 인간이 죽었다".
한병철 이전에 이미 종교학자였던 고 길희성 교수는 " 계몽주의 시대의 로고스(이성)가 과학은 낳아 길렀지만 미토스의 세계(신성)는 죽여버렸다"고 개탄한 적이 있다. 그의 사상을 총정리한 책이 '영적 휴머니즘'이다. 그는 평생 한 가지 질문을 붙들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의 대답은 '영적 휴머니즘'이었다. 종교의 언어와 인문학의 언어를 하나로 묶어, 인간 존재의 깊이를 회복하자는 제안이었다. 신앙과 이성,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가로지르며 그가 지켜온 것은 결국 하나였다.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효율로 환원될 수 없는 내면의 차원이 있다는 것.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내면의 차원이 조직적으로 해체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멈출 수 없는 기술 문명 안에서 영적 휴머니즘은 퇴각이 아니라 저항이다. 침묵을 지키는 것,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는 것, 효율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깊이를 신뢰하는 것, 이것이 알고리즘에 맞서는 인간의 방식이다. 우리가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신이 우리를 찾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되찾는 것이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