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째 논란이 된 보험사 의료자문제도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답보상태다. 당국은 지난해 보험사 의료자문제도의 개선책을 내놨지만 이해당사자들 간의 절충점을 찾지 못해 구체적인 방안을 확정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보험사 의료자문제도란 보험소비자가 보험금을 청구한 경우 보험사가 자문의사에게 의학적 소견을 받는 것을 말한다. 환자를 치료한 주치의의 판단은 보험금 지급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보험사는 자문의 소견만으로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한다. 이는 환자의 상태나 치료과정을 정확히 알기 어려운 제3자 의료인에게 보험금 지급에 대한 판단을 맡긴다는 점에서 늘 분쟁의 불씨가 됐다.
◆의료자문만으로 보험금 ‘쥐락펴락’
보험사는 보험가입자가 질병에 걸렸을 경우 관련 보험상품 약관에 근거해 보험금을 지급한다. 이때 질병의 주 요인이 되는 경로가 약관과 어긋날 경우 보험사는 지급을 거절하거나 보험금을 축소해 지급할 수 있다. 예컨대 뇌출혈 진단을 받은 환자가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했지만 자문의 소견이 뇌출혈 과정에서 치매나 고령 등 다른 요인이 더 컸다고 판단할 경우 보험금을 받지 못하는 식이다.
문제는 보험 의료자문에 따른 보험금 부지급건수와 보험사와 소비자 간의 분쟁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보험 의료자문 건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생명·손해보험사 전체 기준으로 2014년 5만4399건이던 의료자문은 2016년 8만3580건으로 53.6% 늘었다.
늘어나는 의료자문건수만큼 부지급건수도 높은 편이다. 지난해 상반기 생·손보사의 의료자문 의뢰건수는 3만1514건이었지만 부지급된 경우는 1만8579건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특히 보험금 지급이 질병과 관련이 깊은 생보사의 경우 의뢰건수가 1만4638건, 부지급건수가 9902건으로 70% 이상을 차지했다. 보험사와 소비자간 의료자문 분쟁 건수도 2013년(1364건) 이후 매년 늘어나 지난해 2112건을 기록했다. 정당한 자문으로 보험금 부지급이 결정된 사안도 있겠지만 부지급비율이 과도하게 높은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의료감정을 두고 소비자와 보험사가 이견이 있으면 표준약관에 따라 함께 제3의료기관을 정해서 의뢰할 수 있다. 하지만 보험사가 제3기관을 거칠 수 있다는 설명을 소비자에게 제대로 고지하지 않아 이를 아는 가입자가 드문 실정이다. 또한 자문의는 실제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 보험사 자료만을 근거로 소견을 낸다. 자문병원 소견만으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축소하는 불합리한 관행이 여전히 지속되는 것이다.
가입자들은 의료자문동의서를 거절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보험사는 가입자가 보험금을 청구하면 의료자문동의서를 제시해 동의를 받고 있다. 동의할 경우 자문의 소견은 보험금 지급의 근거로 활용된다. 보험사와 의료자문 분쟁을 하고 있는 A씨는 "손해사정사가 의료자문에 동의하지 않으면 보험금 지급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엄포를 놨다"며 "대부분 이런 이유로 의료자문을 거절하기 힘든 분위기"라고 토로했다.
오세헌 금융소비자원 보험국장은 "보험사는 환자를 보지도 않은 익명의 자문의에게 서류만 보여주고 유리한 소견서를 받고 이를 빌미로 주치의 진단서를 부정하고 있다"며 "이는 보험사의 주된 의무인 보험금 지급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으로 부당하고 불공정하다"고 강조했다.
자문의들은 의료자문 건당 수십만원에서 많으면 수백만원을 지급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루에 한건, 한달만 의료자문을 진행해도 수백만원의 고수익을 챙길 수 있다. 보험사들은 지난해 155억원을 자문료로 썼다. 이 비용으로 수백억원대 보험금을 아낄 수 있었던 것이다.
고액의 자문료를 받는 자문의 입장에서는 굳이 보험사에 불리한 소견을 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보험사 입장에서도 유리한 소견을 받을 수 있는 자문의가 많은 병원을 선호하게 된다. 지난해 1분기 생보사 자문 상위권 병원을 살펴보면 고려대 의과대학부속병원(안암), 인제대 상계 백병원, 서울의료원 등 특정 의료기관에 쏠렸다.
자문의 선정과정도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국내 주요 보험사들과 생·손보협회는 의료심사위원회를 구성한 상태다. 이 위원회 소속 의사들이 보험금 지급 여부를 자문하는데 생보사의 경우 위원회 소속 의사가 아닌 개별 자문의에게 자문을 받는다. 위원회 소속 자문의 풀(Pool)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 것이다.
손보사 역시 일반·장기보험이 아닌 자동차보험 진료에만 자문의 풀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자문의 풀이 유명무실한 상태다. 보험사들이 각사별로 자문료를 지급해 특정 병원과 관계를 맺고 있어 굳이 자문의 풀을 이용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의료자문 관련 분쟁이 잦아지자 금융당국도 제도 개선에 나섰다. 지난해 금감원과 생·손보협회는 보험회사가 전문의 소견을 핑계로 보험금 지급을 부당하게 거절하지 못하도록 '의료분쟁 매뉴얼' 초안을 마련해 올 1분기 중 확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금감원은 매뉴얼에서 진단서 등 계약자의 의학적 증거가 위·변조되지 않았다면 보험금을 무조건 주는 것을 의료분쟁의 조정원칙으로 삼는다고 설명했다. 또 앞으로 자문 의사가 속한 병원명과 전공과목, 자문 횟수를 금감원 홈페이지에 게시하고 의료자문이 잦은 보험사와 병원의 ‘블랙리스트’를 공개하는 한편, 자문 병원과 전공과목, 의사 실명까지 법원행정처에 제공할 것이라 밝혔다. 보험사는 이를 어기면 행정 처분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같은 매뉴얼은 여전히 확정되지 않고 있다. 금감원 측은 매뉴얼에 대해 "업계와 어떤 내용을 담을지 논의 중"이라는 입장이다. 업계에서는 최근 터진 암 보험금 이슈로 인해 당국이 매뉴얼에 추가로 담을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문도 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당국이 자문절차를 손보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 수년째"라며 "매뉴얼이 지연되면 금융소비자 권리 향상을 중점과제로 추진 중인 당국의 신뢰도에도 금이 갈 수 있다. 빠른 결정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50호(2018년 7월25~3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