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에 홀리고 ‘병맛’에 물들다] ①‘B급’ 전성시대
“이 콜×××나 오리지널 블랙커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100% 콜롬비아산 아라비카 원두를 미디엄 로스팅해서 콜롬비아에 사는 36세 지오반니 프랑크 가르시아도 한모금만 마시면 아싸라비야 다비드비야 닭다리먹고 삐약삐약을 외치다가 개오져버리는 마음을 주체 못하고 편의점 알바생한테 레알 감동실화 오지마을 이장님도 울고 가버릴 프러포즈 해버릴 정도의 깊은 맛을 내고 있는 부분인지용?”
한눈에 읽기 벅차고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 긴 대사는 커피브랜드의 광고 카피다. 1970년대를 연상케 하는 우스꽝스러운 그림과 ‘급식체’로 일컬어지는 대사가 버무려진 이 영상은 조회수 885만회에 댓글 9154개를 기록하며 히트를 쳤다. 과거에는 부족하고 저급한 것이라 취급받던 B급 문화가 트렌드로 자리잡은 세태를 잘 반영하는 사례다.
| B급 문화의 하나로 취급되던 크리에이터 장삐쭈의 채널은 구독자 140만명이 넘는다. /사진=유튜브 캡쳐 |
◆B급이 뜨는 ‘느낌적인 느낌’
B급이 대세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B급 문화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다만 주류에서 벗어난 하위문화로 대중의 지지를 받는 문화콘텐츠를 통칭하는 것이 보통이다. B급 문화는 사회 기득권에 대한 저항 혹은 부조리에 대한 풍자 성격을 지니지만 재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존 저항문화와 결을 달리 한다.
B급 문화의 특징은 위약적인 촌스러움과 의도적인 저급함, 유치하고 어설픈 느낌, 폭력과 섹스같이 억압된 인간의 본능을 강하게 자극하는 내용 등이다. 이 특징은 주류문화가 해결할 수 없는 대중의 욕구를 시원하게 긁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힙합은 태생이 완벽한 B급 문화다. 힙합의 주요 소재는 욕설, 비행, 갱, 마약 등 불온한 내용이다. 문화의 소비 역시 미국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흑인 빈곤계층을 토대로 한다. 힙합은 즉흥적이고 반복적인 리듬, 교범보다 감각에 기반하는 경향이 강해 주류 음악계에서 철저히 외면 받았다. 하지만 힙합은 미국을 넘어 전세계에 확산 중이다. 1990년대 후반 한국에 발을 들인 힙합은 최근 젊은층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며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 유브이. /사진=뉴시스 DB |
B급 코드로 유명한 개그맨 유세윤과 가수 뮤지는 2010년 ‘유브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꾸준히 활동 중이다. ‘개가수’(개그맨+가수)의 시초라 불리는 유브이는 복고풍 콘셉트를 배경으로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선보이면서 탄탄한 마니아층을 확보했다는 평을 받는다. B급 감성을 내세운 이들은 지난해 국내 최정상 ‘A급’ 뮤지션으로 인정받는 정재형, 유희열과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후 앰 아이’(Who am i)라는 곡을 선보여 찬사를 받았다.
“누가 그랬죠.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근데 아프면 환자지 개××야” 등의 어록으로 유명한 ‘병맛’(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 유병재도 화제다. 유병재의 스탠딩 코미디쇼 <블랙 코미디>는 한국 코미디 최초로 넷플릭스를 통해 방송됐고 공연은 1분 만에 4000석 전석이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운 굿즈 ‘이달의 병재’와 그의 얼굴이 그려진 스마트폰케이스도 젊은층의 환호를 받으며 날개 돋친 듯 팔렸다.
| 신한은행 ‘신한플러스 엄마의 당부’. /사진=유튜브 캡쳐 |
B급 문화라는 이름의 태풍은 안전함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광고계와 금융권도 집어삼켰다. 지난해 11월18일 신한은행이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신한플러스 엄마의 당부’편은 스타배우 없이도 조회수 531만회를 돌파했다. 시청자들은 “광고 보러 유튜브 켜긴 처음이다”, “엄마 역 배우의 연기가 오져버렸다” 등의 댓글로 크게 호응했다. B급 문화가 성공하기 어렵다고 알려진 보수성향의 업종에서도 흥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였다.
한 대중문화 전문가는 “B급 문화 또는 감성을 담은 광고를 통해 심리적인 문턱을 낮추고 소비자와의 접점을 넓히기 위한 기업들의 자구책”이라며 “권위를 내세우던 기존의 방식보다 B급 코드를 사용한 광고가 소비자에 재미를 안겨줄 수 있고 친근함을 느끼게 해 인기를 끈다”고 설명했다.
| 유병재 스마트폰케이스. /사진=머니투데이 DB |
◆‘싼티·촌티’ 나는 B급의 인기 비결
B급 문화가 주류에 버금갈 정도로 확산된 배경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먼저 정보화의 확산이 B급 문화에 힘을 실었다고 분석한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보급으로 방대한 양의 정보가 쉴 틈 없이 업로드된다. 사람들은 온라인을 통해 쏟아지는 콘텐츠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는데 이 정보의 홍수 속에는 이미 멋있거나 세련된 콘텐츠가 넘쳐나고 일종의 ‘권태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환경에서 B급 문화의 유치하고 촌스러운 유머코드와 직설적인 표현이 신선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B급 문화의 확산이 현실의 팍팍한 삶과 관련 있다는 견해도 있다. 경기불황이 장기화되고 소득양극화가 뚜렷해지면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B급 문화에서 희열을 느낀다는 것. 억눌린 감정을 풀 길이 없는 사람들이 B급 문화에 기대 억지웃음이라도 짓고자 몸부림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태연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인간은 내면의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면 원초적 수준의 욕구를 충족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B급 문화의 확산 원인을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일부 기득권에 의해서만 향유된 주류문화에 반감을 가진 젊은이들의 비판의식 역시 B급 문화의 활성화를 도왔다고 주장한다. 이혁준 문화평론가는 “기존 주류문화는 몇몇 주도세력의 교육에 의해 향유됐다”며 “이제 대중은 선망의 대상에 불과했던 콘텐츠보다 동료의식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생산한 콘텐츠,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본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에 열광하며 감정이입을 한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85호(2019년 3월26일~4월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