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총재의 스쳐가는 리디노미네이션 발언으로 화폐개혁 논의가 대한민국을 또 강타했다. 일각에선 정치적 이슈를 고려한 존재 과시용 군불때기일 뿐이라며 폄훼하지만, 또 다른 진영에선 침체된 경제의 불씨를 되살릴 불쏘시개가 될 것이라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원화가 상대적으로 저평가 됐다는 시각에는 모두가 공감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현 시점이 1000원의 액면가를 1원으로 줄여야하는지에 관해서는 저마다들 말이 참 많다. 확산된 논란이 부담스러웠는지 한국은행도 은근슬쩍 발을 빼려는 모양새다. ‘머니S’는 변죽만 울리는 화폐개혁의 본질을 알아보고 지금 왜 이 논쟁이 필요한지 짚어봤다. [편집자주]
[또… 변죽 울리는 ‘화폐개혁’] ④전문가 5인의 찬반 논리 들어보니
[또… 변죽 울리는 ‘화폐개혁’] ④전문가 5인의 찬반 논리 들어보니
금융권에서 '리디노미네이션'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정치권은 우리나라 경제와 금융거래 규모가 커진 만큼 화폐의 액면단위를 바꿀 때가 됐다고 주장한다. 여당 국회의원들은 다음달 13일 국회에서 정책토론회를 열고 리디노미네이션 추진을 논의한다.
반면 화폐를 발행하는 한국은행은 '아직 때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리디노미네이션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해 신중한 입장이다. 화폐단위 변경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정책금융기관이 엇박자를 내고 있어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 /사진=이미지투데이 |
◆찬성 “국제위상 걸맞게, 무기한 교환 대안”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가치를 그대로 두고 1만원을 10원으로, 100원을 1원으로 바꾸는 등의 방식으로 액면가를 낮은 숫자로 변경하는 것을 일컫는다.
우리나라는 정부수립 이후 두차례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2월과 박정희 군사정부 시절인 1962년 6월이다. 1차에는 100원을 1환으로, 2차에는 10환을 1원으로 변경했다.
<머니S>가 경제전문가 5인을 대상으로 리디노미네미션의 필요성을 질문한 결과 찬성은 2명, 반대는 3명으로 나타났다.
먼저 리디노미네이션을 찬성하는 전문가들은 화폐 액면을 바꿀 ‘시기’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우리나라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달러를 돌파해 경제대국 12위에 올랐다. 경제여건이 선진국 반열에 올라 화폐단위도 바꿀 시점이란 주장이다.
실제 원화는 단위가 크고 환율이 지나치게 높아 외국인 투자자들이 값을 치를 때마다 혼란을 겪는다. 1달러를 네 자리로 표기하는 국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화폐액면 단위를 낮춰 1달러 당 1100원대의 환율을 900대로 내리면 수출기업에 활기를 불어넣고 우리 국가의 위상을 제고할 수 있다”며 “원화가치 신인도와 신뢰도를 회복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리디노미네이션을 활용해 내수부양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화폐단위가 바뀌면 은행은 현금지급기는 물론 금융거래 관련 각종 소프트웨어를 대체한다. 기업도 생산된 제품의 가격표를 바꿔야 한다. 자연스럽게 소비가 진작되고 부가가치산업이 살아날 수 있다.
다만 급진적인 화폐개혁은 경기불안이라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어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루아침에 기존 화폐를 없애고 새 화폐를 쓰는 게 아니라 무기한으로 구권을 신권으로 교환해주는 것이 방법 중 하나다.
과거 유렵연합(EU)은 기존 화폐와 유로화 간 교환이 가능하도록 10년 이상 장기간 교환을 허용했다. 유로화는 3년간은 주식·채권시장, 은행, 상품가격표시 등에서 ‘장부상 통화’로만 존재했다가 2002년 1월1일부터 실제 화폐로 통용됐다. 유럽 각국의 국민이 유로화를 새 통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적응기간을 둔 것이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유럽처럼 구권과 신권을 장기간 익명으로 교환 가능하도록 한다면 한국의 리디노미네이션에도 혼란은 없을 것”이라며 “정부가 화폐교환 기간을 넉넉히 설정하면 환전비용 부담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대 “통화정책, 정치 아닌 경제관점”
리디노미네이션을 반대하는 전문가들은 ‘부작용’에 무게를 둔다. 먼저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경제혼란을 우려한다. 우리나라 경제의 몸집은 커켰지만 내실은 부족한 형국이다.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3만달러를 돌파한 반면 2017년 3%가 넘었던 실질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2.7%로 떨어졌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명목성장률은 20년 만에 최저로 떨어졌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무리한 화폐개혁은 침체된 우리 경제를 더욱 흔들게 될 것”이라며 “굳이 사회적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화폐개혁을 가져갈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화폐개혁보다 경제체질 개선이 급선무라는 의견도 나왔다. 통상 리디노미네이션은 초인플레이션 등으로 화폐신뢰가 무너졌을 때 정부가 꺼내는 카드다. 우리나라는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저물가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은은 지난 1월 경제전망에서 물가전망치를 기존 1.7%에서 1.4%로 대폭 내렸다. 물가가 꾸준히 내려가는 건 우리 경제성장을 떨어트리는 요인이다.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경기회복과 물가상승, 경제위상 제고를 위해 화폐단위를 변경한 나라는 한 곳도 없다”며 “화폐단위가 아닌 가치를 높여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선진국과 경제위상을 겨루는 것에 통화정책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화폐단위 교체 시 막대한 투자에 따른 후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은에 따르면 화폐의 액면을 바꿀 경우 2004년 기준 약 2조6000억원이 투입된다. 15년이 지난 지금 화폐개혁 비용은 수조원이 더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윤창현 서울시립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화폐단위를 1000대 1로 바꾸면 현재 950원짜리 물건은 0.95원이 돼야 맞지만 현실에서는 1원으로 오른다”며 “리디노미네이션이 가져올 편익에 비해 비용이 크다. 비용을 발생시키면서 화폐개혁을 추진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정부가 승인하면 국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실시할 수 있다. 한은법 49조는 ‘정부의 승인을 얻어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하는 바에 의해 규격·모양·권종의 한국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사회·경제적으로 파급이 큰 사안에 국민적 공감대가 얼마나 형성될지 두고 볼 일이다.
전문가들은 화폐개혁은 정치가 아닌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리디노미네이션으로 물가지표를 어느 정도 개선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제대로 된 경기회복이 아니라 잠시 수치만 오르내리는 착시효과만 일으킬 뿐이라는 지적이다.
윤 교수는 “화폐단위가 바뀌면 물가상승과 숫자에 적응하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며 “현금자산에 불안해진 투심이 부동산으로 흘러 각종 규제로 잡아놓은 주택가격이 다시 오르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경기불황을 탈피하려는 수단으로 통화정책에 손을 대면 국민의 불신만 늘어날 것”이라며 “리디노미네이션은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 교수는 “경기불황을 탈피하려는 수단으로 통화정책에 손을 대면 국민의 불신만 늘어날 것”이라며 “리디노미네이션은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89호(2019년 4월23~2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