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맏형’ 역할을 하던 전경련은 2016년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에서 K스포츠재단과 미르재단 모금을 주도했다고 지목돼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으로 삼성·현대차·SK·LG 등 주요 회원사인 4대 그룹이 탈퇴하면서 규모와 위신이 크게 꺾였다.
사회적으로 해체 압박이 거세지자 전경련은 ‘한국기업연합회’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을 비롯해 정경유착 근절과 연구 기능·투명성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혁신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명칭 변경조차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대한상의·경총에 밀려난 모양새
이 가운데 경제단체 수장의 자리를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가 대신했다. 최태원 SK그룹 총수는 지난 3월 대한상의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최 회장은 지난 21일(현지시각)부터 3박5일 일정으로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경제사절단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진행된 양국 정상의 교류 행사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을 산하에 두고 해왔던 경제계 싱크탱크 역할도 위기에 처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올해 경제학 박사 학위자를 대상으로 특별채용을 실시하면서 노사관계를 넘어서 경제 전반으로 연구 영역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총은 지난달 24일 ‘경총 경제자문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경총은 “최근 경기 회복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 현황을 진단해보고 전망과 정책 방향을 경제전문가들과 함께 고민해 보고자 이번 자문위원회를 열었다”고 밝혔다.
정규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장은 이날 대내외 경제환경과 한국경제 전망 및 정책 방향에 대해 발표했다. 정 실장은 “올해 경제성장률은 3.8%를 기록할 것이다. 경제 여건을 종합하면 경기회복은 점진적으로 진행되겠으나 부문별로 경기 충격과 회복 속도는 불균등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어서 “한국경제 전망에 대한 위험 요인으로는 ▲백신 보급 속도 지연 ▲국가별 경기 회복 속도 불균등으로 인한 경기 불안 ▲미·중 무역 갈등 지속 등 크게 3가지를 들 수 있다”고 언급했다.
경총은 1970년 산업화 시대에 각종 노동문제가 발생하자 기업의 조직적 대응을 위해 출범했으며 노사문제에 집중해 전문성을 키워온 단체다. 손경식 CJ그룹 회장이 2018년 경총의 수장이 된 이후 전통적인 노사 관련 업무에 더해 경제정책·산업정책·경영제도·규제혁신 등을 다루면서 종합경제단체로 거듭나고 있다.
실제로 손 회장은 경제단체 간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이유로 전경련에 통합을 제안했으나 전경련은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경총의 위상이 높아진 상황에서 두 단체가 통합하는 것은 전경련이 경총에 흡수되는 꼴이라는 게 재계 중론이다.
전경련, 환골탈태 가능할까
경제단체 통합과 쇄신 목소리가 안팎으로 커지면서 허창수 전경련 회장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허 회장은 올해도 회장으로 추대되면서 2011년부터 10년간 전경련을 이끌고 있다. 그는 2016년 12월 국정농단 사태에 이승철 전 부회장이 관련돼 물의를 빚은 점을 사과하며 사임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존폐위기에 놓인 전경련을 살려야 한다는 전경련회장단의 권유로 지금까지 회장직을 유지하고 있다. 허 회장은 앞서 수차례 퇴진 의사를 밝혔으나 후임자가 없어 연임을 수락한 상황이다.
허 회장 연임과 함께 권태신 상근부회장도 2017년부터 줄곧 자리를 지키고 있다. 권 부회장은 2017년 2월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정경유착을 단절하고 전경련의 환골탈태를 이끌어 경제성장의 싱크탱크로 거듭나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자체 쇄신은 불가능하다는 평가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허 회장은 지난 2월 열린 제60회 정기총회에서 “무기력한 경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주인공은 바로 우리 기업”이라며 “불합리한 규제로 애로를 겪는 기업의 목소리를 모아 정부와 국회에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경련 사업은 기업만의 이익을 위한 일이 아니라 국가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정계 한 관계자는 “전경련은 규제 완화를 외치는 로비 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기업과 총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는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지난 정부 때 국민들이 전경련 해체를 요구했던 것은 단순히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불법모금 때문만은 아니다”라며 “설립 이후 지금까지 재벌 이익을 대변하고 정경유착을 주도해 시장경제 질서와 사회의 공정성을 훼손한 것이 본질적인 이유”라고 비판했다.
이어서 “전경련이 환골탈태를 이루려면 과거를 반성하고 재벌 이익 수호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버리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