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경영이 요구되는 상황과 다르게 국내 기업들은 관련 가이드라인을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픽=김민준 디자인 기자

하루 평균 80억톤(t)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는 세계 최대의 섬 그린란드. 기업 총수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 발생하는 불법적 탈세 문제와 분쟁 리스크. 노동시간 단축과 협력업체 상생 등 기업의 각종 책임.

글로벌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열풍이 과열되는 배경에는 전 세계가 안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내포돼 있다. 하지만 ESG 경영이 요구되는 상황과 다르게 국내 기업들은 관련 가이드라인을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ESG는 기업의 장기적 가치와 지속가능성을 평가할 때 비재무적인 요소를 반영하는 것인데 개념 정립이 미흡한 상황에서 관련 자문·평가 기관들만 난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서 ESG 표준 도입의 필요성을 언급할 정도로 중요성이 커지며 기업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국내 기업 ESG 도입 현황은?

금융위원회는 올 2월 ‘ESG 국제동향 및 국내 시사점’ 보고서에서 “글로벌 금융회사·투자은행·신용평가사 중심으로 상품개발 및 투자 의사결정에 ESG를 적극 반영하는 중”이라며 “블랙록, JP모건, 피치 등 대형 금융회사 중심으로 ESG 요인을 고려한 경영전략이 활성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글로벌 투자기관의 ESG를 고려한 투자 사례는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지난 6월 니케이아시아 보도에 따르면 올 상반기 글로벌 ESG 회사채 발행 규모는 2568억달러(약 290조원)로 전년동기대비 3.4배 증가했다. ESG 채권은 사회적 책임투자를 목적으로 발행되는 채권이다. 국내 기업들도 비상이 걸렸다.

국내 주요 기업들은 ESG 위원회, 지속가능경영위원회 등 ESG 관련 조직을 설립하며 ESG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자산총액 기준 국내 10대 그룹은 모두 관련 조직을 신설한 상태다. 재계 톱3 그룹을 보면 삼성전자는 올해 기존 ‘거버넌스위원회’를 ‘지속가능경영위원회’로 변경했다. 현대차도 기존 ‘투명경영위원회’를 ‘지속가능경영위원회’로 확대 개편했다. SK는 지난해 그룹 산하 ‘SUPEX(수펙스)추구협의회’ 내에 환경사업위원회와 거버넌스위원회를 추가했다.

정부의 ‘ESG 공시 의무화’ 규제도 강화됨에 따라 기업들의 ESG 도입 움직임은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금융위는 올 1월 2조원 이상 자산을 보유한 코스피 상장기업에 대해 2025년부터 ESG 공시를 의무화한 ‘기업공시제도 종합 개선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나머지 코스피 상장기업도 2030년부터 적용된다. ESG 위원회 설치를 마친 기업들은 기업지배구조보고서와 별도로 ESG 보고서를 마련하는 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난립하는 평가기관 문제는?

ESG 경영에 주목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ESG 자문·검증·평가를 수행하는 국내 기관들도 급증하는 추세다. ESG 평가지표를 발표하는 국내 기관만 600여곳. 여기에 ESG 위원회에 자문하거나 ESG 보고서를 검증하는 기관들도 생겨났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한국생산성본부, 로이드, 한국품질재단, 한국경영인증원 등이 대표 기관들이다. 문제는 공신력 없는 기관들도 가세해 ESG 자격증이나 최고위원회 과정 등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문형남 숙명여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ESG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 측면에선 긍정적이지만 ESG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기관의 컨설팅으로 인해 기업 경영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평가기관별로 ESG 지표가 상이한 점도 문제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3월 17~23일 매출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ESG 준비실태 및 인식조사’ 결과, 응답자 29.7%가 ESG 관련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모호한 범위와 개념’을 꼽았다. ‘기관마다 상이한 ESG 평가방식’과 ‘추가비용 초래’는 각각 17.8%를 차지했다.

기업 입장에선 ESG 기관의 역량, 공정성, 신뢰성을 파악할 방법이 아직까지 없는 상황이다. 이제 막 생겨난 ESG 시장에서 관련 기관을 평가할 통계가 없기 때문이다. 윤진수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본부장은 “ESG 열풍으로 단순히 돈을 벌고자 시장에 접근하는 기관들이 난립하고 있다”며 “기업들은 이들 기관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글로벌 트렌드에 부응하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컨설팅을 의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재계 관계자는 “평가 지표가 기관별로 천차만별이어서 여러 기관에 ESG 평가를 의뢰하고 있다”며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여러 기관을 전전하고 인력과 비용이 낭비된다”고 호소했다.

부실한 기관들은 시장 논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윤 본부장은 “하나의 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옥석 가리기’가 나타날 것”이라며 “글로벌 시장에서도 인수·합병(M&A)이 이뤄져 경쟁력이 떨어지는 ESG 관련 업체가 흡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19년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ESG 평가기관인 비지오 아이리스(Vigeo Eiris)의 지분 상당수를 인수했다. 같은 해 모건스탠리인터내셔널캐피털(MSCI)도 환경 핀테크·데이터 분석기업 ‘카본 델타’(Carbon Delta)를 인수했다.

정부는 이 같은 사태를 수습하고자 오는 12월까지 범부처 합동으로 ‘한국형 ESG’(K-ESG) 가이드라인을 마련한다는 입장이다. 국내·외 주요 지표를 분석해 공신력을 높이고 종합 대응 매뉴얼을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K-ESG는 국내 기업의 경영환경과 특수성을 고려해 표준화된 지표로 만들어질 방침이다.

대기업을 위주로 ESG 도입 움직임이 가시화되며 중소기업 등에 대한 ESG 교육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문 교수는 “지역 중소기업이나 공공기관이 ESG 글로벌 트렌드에 합류할 수 있도록 정부가 ‘ESG 지원센터’를 설립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