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국은행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 참석, 기준금리 세차례 연속 동결 결정 배경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사진=뉴스1

올 2월부터 3회 연속 기준금리 동결을 이어간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2021년 8월부터 올 1월까지 1년6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3%포인트 올렸지만 기대했던 통화긴축 효과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시중은행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3%대로 내려앉으면서 주택담보대출을 중심으로 가계대출이 다시 늘고 있다. 가계빚이 감소세를 멈추고 다시 증가세로 돌아서면 한국 경제의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다.


9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시중 통화량인 광의의 통화량(M2평잔 계절조정)은 기준금리 인상 직전인 2021년 7월 3438조6463억원에서 올 3월 3810조3775억원으로 20개월만에 371조7312억원 늘었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2021년 8월부터 0.50%였던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린 데 이어 지난해 4월부터 올 1월까지 7회 연속 금리 인상을 단행해 0.50%였던 기준금리를 3.50%까지 끌어올렸다. 이후 올 2·4·5월 기준금리 동결을 이어가고 있다.

M2란 시중에 얼마나 돈이 풀렸는지를 보여주는 통화지표 중 하나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3%포인트 올리는 동안 시중에 풀린 돈이 오히려 통화 긴축정책을 펴기 이전과 비교해 더 늘었다는 얘기다.


문제는 시중에 풀린 돈이 제대로 돌지 않고 '돈맥경화' 현상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머니S가 한국은행 통화량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한은이 공급한 돈이 시중에 얼마나 순환되는지 보여주는 '통화승수'는 올 3월 기준 14.8배로 지난해 7월(13.6배)를 찍은 뒤 여전히 부진한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통화승수는 광의통화량(M2)을 본원통화량으로 나눈 값으로 중앙은행이 화폐 1원을 공급했을 때 시중 통화량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나타낸다.

통화승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26배 수준을 이어오다 ▲2010년 24.3배 ▲2014년 19.4배 ▲2018년 15.9배 ▲2022년 14.1배를 기록하며 지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유동성이 늘어난 상황에서도 돈이 돌지 않는 이유는 경기 침체에 따른 소비 부진이 원인으로 꼽힌다.

고물가·고금리 등으로 서민들이 지갑을 닫고 경기 침체로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면서 돈이 제대로 돌지 않고 있다.

여기에 정부와 금융당국이 금융권에 상생금융을 강조하면서 은행권의 주담대와 전세대출 금리는 3%대로 떨어지자 대출 수요가 다시 살아나 가계부채 리스크를 키우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금융권에선 금융당국의 상생금융 정책과 한은의 통화긴축 정책이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의 통화긴축 효과가 반감되면 가계부채 연착륙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다. 올 1분기 말 기준 가계대출과 판매신용을 합한 가계신용은 1853조90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조원(-0.5%) 줄어 통계 편제 이후 첫 감소세를 나타냈다. 전분기와 비교해선 13조7000억원(-0.7%) 줄어 역대 최대 감소폭을 나타냈다.

하지만 지난달을 기점으로 주요 시중은행의 가계대출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잔액은 5월 말 기준 677조6122억원으로 지난 4월 말(677조4691억원) 대비 1431억원 증가했다. 지난해 1월부터 16개월 연속 이어지던 가계대출 감소세가 지난달 증가세로 돌아서며 디레버리징이 힘을 잃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3연속 동결에도 금융당국의 대출금리 인하 압박으로 시중은행 주담대, 전세대출 최저금리가 3%대로 떨어지면서 가계대출 수요가 덩달아 증가한 것이다.

한국은행 역시 이같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 한은은 과도한 가계빚이 경제성장 발목을 잡는 위험 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빚이 많아 이자상환 부담이 커진 가계는 여윳돈이 부족해지는데 이는 소비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한국은행 통화정책국이 39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3년 누적으로 1%포인트 오르면 4~5년의 시차를 두고 경제 성장률이 0.25~0.28%포인트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년 가까이 통화 긴축 기조가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 가계 빚은 국가 경제 규모에 비해 세계 주요국 중 가장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국제금융협회(IIF)의 '세계 부채(Global Debt) 보고서'에 따르면 올 1분기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2.2%로 세계 34개 나라(유로 지역은 단일 통계) 중 1위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은 지난 8일 국회에 제출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를 통해 "기준금리 인상의 영향으로 주택가격이 하락하고 가계부채 비율도 완만히 하락했으나 누증된 금융 불균형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특히 가계부채 비율은 최근 하락에도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어 앞으로도 디레버리징이 중장기에 걸쳐 꾸준히 지속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높은 가계부채 수준은 가계의 소비를 제약하고 금융위기 가능성을 증대시키거나 성장잠재력을 훼손함으로써 장·단기 시계에서 모두 거시경제와 금융안정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