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의정서에 의거해 일제와 조선정부간의 군용지 수용협상이 이뤄지고 1905년 7월26일 본격적인 군사기지 공사가 이뤄졌다. 사진은 용산 일본군 사령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한일의정서에 의거해 일제와 조선정부간의 군용지 수용협상이 이뤄지고 1905년 7월26일 본격적인 군사기지 공사가 이뤄졌다. 사진은 용산 일본군 사령부.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904년 2월23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세력권에 넣었음을 확인하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됐다.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일본의 본색이 드러난 것이다.

1903년 11월23일 고종은 러·일전쟁에 대해 "본국은 관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고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고종을 알현한 일본 공사는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을 송두리째 무시하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일제의 조선침략이 노골화되자 국민의 비난과 원성이 하늘을 찔렀으나 결과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한일의정서는 개인 간 거래로 체결됐다?


한일의정서 체결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일본 제국의 한반도 식민지화 작업이 시작됐다. 사진은 당시 체결된 한일의정서 중 일부. /사진= 외교부
한일의정서 체결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일본 제국의 한반도 식민지화 작업이 시작됐다. 사진은 당시 체결된 한일의정서 중 일부. /사진= 외교부

1904년 대한제국을 병합하려는 일본과 만주에 주둔하던 러시아는 만주와 대한제국을 두고 협상을 벌였다.

당시 대한제국은 양국의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23일 '국외 중립'을 선언했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원산과 거제에 해군을 주둔시켰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이 결렬되자 2월10일 러시아를 향해 선전포고했다.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일본 하야시 공사는 이노우에 일본군 제12사단장과 함께 한·일 간 의정서 체결을 강압했다. 반일·친러파였던 이용익 탁지부 대신 겸 내장원경을 일본으로 납치하고 그밖에 일본에 반대하던 길영수 육군 참령, 이학균 육군 참장, 현상건 육군 참령 등을 감시 조처했다.


그 이후 하야시 공사가 이지용 외부대신을 1만엔의 뇌물로 매수하면서 양국 간 협약인 '한일의정서'가 체결됐다.

그 내용은 이렇다.

① 한국정부는 일본을 신임하여 '시설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
② 일본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전을 도모할 것
③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할 것
④ 제3국의 침략으로 한국에 위험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본은 이에 신속히 대처하며 한국정부는 이와 같은 일본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정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
⑤ 한국과 일본은 상호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

표면적으로는 황실의 안전과 대한제국의 독립, 영토 보전을 약속하는듯 보이나 그 이면에는 대한제국의 정치·군사·외교적 자주권을 제약하는 조항이 담겼다.

한일의정서 한 장으로 고향 잃은 용산 주민들

한일의정서로 군사용지에 수용된 현 용산동 6가 일대의 주민들은 강제 이주를 당한다. 이들이 이주하기 전에 거주했던 곳은 '둔지산'기슭의 '둔지미'마을이었다. 사진에 표시된 부분이 둔지산.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한일의정서로 군사용지에 수용된 현 용산동 6가 일대의 주민들은 강제 이주를 당한다. 이들이 이주하기 전에 거주했던 곳은 '둔지산'기슭의 '둔지미'마을이었다. 사진에 표시된 부분이 둔지산.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한일의정서에 의거해 일본군은 대한제국의 토지를 마음대로 수용했다.

한성 남쪽 '둔지방'은 현재 부분적으로 개방한 용산공원 부지다. 원래 용산은 현 마포대교 쪽에 있었으며 그쪽 행정구역은 '용산방'이었다. 용산방과 둔지방은 엄연히 다른 공간이었으나 일본군이 신시가지를 형성하면서 용산방과 둔지방은 '용산'이라는 명칭 하나로 합쳐졌다.

높은 부지 한가운데 둔지산이 있다고 해서 이 지역 마을을 '둔지미'라고 불렀다. 둔지산 일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던 둔지미 마을 사람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이주를 당했다.

둔지미가 군용지로 수용되자 마을 사람들은 1평당 7전 미만의 보상비를 받고 쫓겨났다. 당시 국밥 한 그릇이 5전이었으니 이는 터무니없는 보상비였다.

용산 주민들은 강제 수용을 당하는 과정에서 격렬히 저항했다. 1905년 8월9일 일본군이 가옥과 무덤 등을 이전하겠다고 발표하고 군대를 동원해 무덤 100여곳을 파헤치자 용산 주민 약 1600명이 한성부 앞에 모여 항의했다. 하지만 일제는 헌병을 동원해 그들을 강제로 진압했다.

이날 격분한 용산 9개 촌의 주민들은 행안부를 찾아가 군용지 수용 문제에 대해 호소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력을 행사하는 일본군에게 속수무책이었다. 그 과정에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여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주모자 10여명이 헌병대에 끌려가고 강제해산 당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됐다.

이후에도 용산 주민들은 군용지 수용에 대한 부당함과 보상금 문제로 저항했지만 1909년 8월 임시군용지 및 철도용지조사국이 폐지됨으로써 보상금 지불 절차는 종료되고 말았다. 주민들은 보상금마저도 받지 못하고 생존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용산공원 부지에는 여전히 대한제국정부에 외면 당하고 일본제국의 폭력 속에 고향을 떠난 둔지미 마을 사람들의 아픔이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