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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금리 시대의 풍부한 유동성과 글로벌 진출을 향한 K-콘텐츠 기업들의 열망이 맞물리며 2020년부터 2022년 사이 K-콘텐츠 기업의 대규모 인수합병(M&A)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조 단위 투자' '업계 최대'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진행된 이들 거래는 큰 기대를 모았지만 현재의 성적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업이 실적 부진과 막대한 손실에 시달리며 기업 재무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앞서 K-콘텐츠 기업들은 글로벌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코자 이타카홀딩스(하이브)를 비롯해 ▲피프스시즌(CJ ENM) ▲왓패드(네이버) ▲언노운월즈(크래프톤)와의 M&A를 잇달아 단행해 왔다.
이처럼 K-콘텐츠 기업들이 M&A와 합작사 설립에 적극 나선 이유는 저금리 기조로 자금 조달이 용이해졌고 급변하는 산업 환경 속에서 첨단 스튜디오 기술과 인프라를 활용해 콘텐츠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K-콘텐츠 기업들은 수천억에서 수조원을 들여 세계적인 콘텐츠·엔터테인먼트 기업을 경쟁적으로 사들인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하이브는 2021년 4월 미국 미디어·엔터테인먼트 기업 이타카홀딩스를 약 1조500억원에 인수하며 엔터테인먼트 업계 최대 규모의 M&A를 성사시켰다. 이타카홀딩스는 저스틴 비버와 아리아나 그란데 등 유명 아티스트를 보유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회사다. 하이브의 글로벌 시장 확대를 위한 발판으로 주목받았다.
CJ ENM은 2021년 11월 미국 할리우드 제작사 피프스시즌(구 엔데버 콘텐츠)의 지분 80%를 약 9200억원에 인수했다. 당시 CJ ENM은 피프스시즌을 통해 글로벌 콘텐츠 제작 경쟁력을 강화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인수 후 피프스시즌은 지속적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2022년 692억원, 2023년 1192억원의 적자를 냈으며 2024년 상반기에도 500억원의 손실을 기록하며 CJ ENM의 실적 악화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네이버는 2021년 북미 웹소설 플랫폼 왓패드를 약 7000억원에 인수하며 웹툰·웹소설 시장의 글로벌 입지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왓패드는 인수 이후 적자 행진을 이어가며 지난 1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콘텐츠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해 자사주를 매각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크래프톤은 2021년 미국 게임 개발사 언노운월즈를 약 8500억원에 인수했다. 최대 규모의 투자를 단행한 만큼 큰 기대를 받았으나 2022년 야심 차게 선보인 '문브레이커'가 흥행에 실패하며 크래프톤의 실적에도 악영향을 끼졌다. 2023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언노운월즈의 손상차손은 약 2445억원이다. 손상차손은 주로 연말 기업이 보유한 자산가치가 하락할 것을 예상해 장부가를 조정하는 작업이다. 2022년 집계된 언노운월즈의 첫 손상차손은 약 1339억원으로 1년 새 약 1106억원 증가해 자산가치 하락을 방증한다.
철저한 산업 분석, 금리 인상 등 전략적 관리 필요
K-콘텐츠 기업들의 M&A 실패는 철저한 산업 분석과 전략적 관리 부재에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콘텐츠 기업은 뚜렷한 유형자산이 없고 '사람'이 기업의 핵심 자산인 경우가 많아 문화적 차이와 관리 통합(PMI) 과정에서 난항을 겪는 경우가 흔하다.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내려다가도 현지 경영진의 반발에 물러서는 사례가 대다수다.일례로 CJ ENM이 인수한 피프스시즌은 2023년 미국 배우·방송인 노동조합의 63년 만의 파업 여파로 가동률이 급감하며 고정비 부담이 커졌다. 이에 따라 피프스시즌의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2023년에만 1179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하이브가 인수한 이타카홀딩스도 주요 인력 관리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화 겨울왕국의 엘사 목소리로 유명한 이디나 멘젤이 회사를 떠났고, 저스틴 비버와 데미 로바토와의 결별설도 꾸준히 제기되며 내부 관리 문제에 직면한 바 있다.
금리 인상 또한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저금리 시절 넘치는 유동성에 기대어 경쟁적으로 높은 가격에 기업을 인수했지만 금리 인상 후 금융 비용이 증가하며 재무적 부담이 가중됐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각각 왓패드와 래디시, 타파스를 서둘러 인수했지만 면밀한 실사 부족으로 대규모 적자를 떠안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손실 누적이 당장의 재무적 부담으로 이어져 콘텐츠 산업 전체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다. 투자 악순환을 불러일으켜 산업 경쟁력에서 뒤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이들 기업은 장기 시너지를 보고 전략적으로 인수한 것이지만 적정 수준을 넘어서는 가치 산정이 이뤄져 장기 성과에 대한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며 "손실이 누적되는 상황에서 눈에 띄는 성과 개선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해외 M&A 포비아로 이어져 앞으로의 투자도 위축될 수 있다"고 했다.
K-콘텐츠 기업들의 대규모 M&A는 글로벌 시장 확장 가능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시도였다. 하지만 무리한 베팅은 현재 실적 부진과 리스크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향후 M&A에 나설때는 '선 인수 후 전략 수립'이 아닌 철저한 시장 조사와 전략적 실행을 바탕으로 보다 신중한 M&A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김영환 NH투자증권 연구원은 "M&A 시장은 입찰 경쟁이기 때문에 '승자의 저주'가 발현되기 쉽고 특히 콘텐츠 기업은 지식재산권(IP)의 적정가치를 산정하기 더욱 어렵다"며 "하지만 동종 업계 내에서의 시너지를 충분히 발현할 수 있는지, 성장성은 풍부한지 등을 철저히 검증해 M&A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