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일수록 변함없이 신뢰할 수 있는 확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됩니다. 매년 3월 17일,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St Patrick's Day)가 바로 그러한 확신 중 하나입니다. 이민의 나라인 아일랜드에 이날은 역사와 문화, 유대감, 그리고 인류 보편의 가치를 공유하는 진정한 축제의 날입니다.
아일랜드는 이 국제적인 관심을 결코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한 나라의 국경일이 국경을 넘어 세계적으로 기념되고 이를 통해 자국의 이야기를 공유할 기회를 얻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그 이야기가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서사가 궁극적으로 희망을 향할 때 비로소 진정한 울림을 준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아일랜드는 번영하지만 과거에는 기아와 빈곤을 겪은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수많은 국가의 현실에 공감합니다. 독립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관용적이고 포용적이며 평등한 사회로 거듭난 것은 불과 지난 반세기 동안의 결실입니다. 인권, 국제법, 다자주의에 대한 지지는 2027~2029년 임기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진출을 통해 수호하고자 하는 핵심 가치입니다.
2026년은 아일랜드에 매우 중요한 해입니다. 오는 7월 역사상 여덟 번째로 유럽연합 이사회 의장국 수임이라는 중책을 맡습니다. 아일랜드 국민에게 지난 의장국 임기는 역사의 변곡점으로 뚜렷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1990년 의장국 당시에는 독일 통일의 길을 여는 유럽 차원의 핵심적 결정이 이루어졌고 2004년에는 유럽연합 회원국이 15개국에서 25개국으로 확대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외연 확장을 이끌어냈습니다.
의장국 수임을 앞둔 현재 국제 정세는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합니다. 러시아의 불법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은 5년째 이어지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독립이 보장되는 정의롭고 포괄적인 평화가 조속히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이 참혹한 전쟁은 유럽 안보에 대한 도전이자 전 세계에 막대한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아일랜드는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미국의 노력을 지지하며 '의지의 연합'의 일원으로서 힘을 보탤 것입니다.
이란과 걸프 지역, 중동 전반의 긴장 상황과 관련해 아일랜드는 일관되게 국제법 존중과 유엔의 역할을 강조해 왔습니다. 현시점의 최우선 과제는 즉각적인 긴장 완화와 외교적 대화로의 복귀입니다. 또한 가자지구 분쟁 종식을 위한 포괄적 계획을 이행하려는 모든 진정성 있는 노력을 지지합니다. 아일랜드는 '두 국가 해법'을 바탕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해 계속 정진할 것입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정착촌 확장과 정착민 폭력, 대규모 강제 이주가 중단되길 희망합니다.
수단에서 민간인들에게 가해지는 참혹한 폭력은 우리 모두의 양심에 경종을 울려야 합니다. 참담한 분쟁을 종식하고 인도적 지원이 즉각적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
평화를 향한 여정은 절대 순탄치 않습니다.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말했듯 "평화는 천천히 드리운다"라는 사실을 역사 속에서 배웠습니다. 군사 중립국인 아일랜드조차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위협에 맞설 대비를 갖춰야 합니다. 아일랜드가 국방 분야에 역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를 추진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아일랜드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안전하고 번영하는 국가로서 동시에 경쟁력 있고 혁신적인 유럽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아일랜드는 유럽연합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으며, 유럽 역시 아일랜드를 깊이 있게 변화시켜 왔습니다. 이번 의장국 임기 동안 유럽연합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단일시장을 심화하는 데 우선순위를 둘 것입니다.
2026년 한국과 아일랜드는 공통의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양국은 대외 의존도가 높은 개방형 경제 국가로서 글로벌 불확실성 속에서 길을 모색해야 하고 고조되는 국제적 대립 속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이러한 도전 앞에서 양국은 긴밀한 경제적, 정치적 협력을 이어가야 합니다.
격변의 시대일수록 아일랜드가 지켜온 안정성은 그 자체로 더욱 빛을 발합니다. 국내외적으로 산적한 과제가 많지만 국가적, 유럽적 차원의 대응을 적극적으로 이끌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가오는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를 맞아 굳건한 포부가 한국과 국제사회에 깊은 울림으로 전해지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