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어떻게 식민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한 자산파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민주화를 달성했을까. 삼성전자는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세계 1위가 됐고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K-Pop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을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됐던 것들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는 배경엔 무엇이 있을까.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에선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우리의 인문학적 바탕을 찾아본다. -편집자-
최제우가 짓고 최시형이 정리한 <용담유사>는 조선을 침략한 일본을 육두문자를 써가며 비난한다. 1875년에 운양호 사건을 일으켜 1876년에 강화도조약을 맺은 일제가 1894년 갑오왜란을 일으킬 때까지 저지른 만행에 대해 당시 백성들의 원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구절들이다.
‘갑오왜란’이란 생소한 용어는 1894년 7월23일 일본군이 불법적으로 경복궁에 무단 침입해 고종을 사실상 포로로 잡은 사건이다. 동학농민군은 갑오왜란을 보고 척왜(斥倭·왜놈을 무찌름) 깃발을 내걸고 10월에 다시 봉기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을 응징하기 위해 1894년 2월에 봉기했다가 청군과 일군이 파병한 6월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해산한 지 4개월여 만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일제의 기관총을 당해내지 못했다. 충남 천안의 세성산과 공주의 우금치에서 패배한 것. 일제는 갑오농민군을 무참하게 학살한 뒤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김홍집 괴뢰내각’을 출범시키고 이른바 ‘갑오경장’을 실시했다.
그동안 국사 교과서에선 ‘갑오경장’만 가르치고 ‘갑오왜란’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종이 1896년 2월 목숨을 걸고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공관으로 망명(국사교과서는 이것도 ‘아관망명’이 아니라 일제가 세뇌한 대로 ‘아관파천’이라 앵무새처럼 되뇐다)한 뒤 갑오경장을 무효화하고 김홍집 괴뢰내각을 붕괴시켰다. 동학으로 정신무장한 농민군은 갑오왜란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거의했던 것이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갑오왜란과 그 이후의 일을 정확히 내다봤다. 그는 1898년경 이용구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갑오년의 일로 말하면 그것은 인사(人事)가 아니라 천명의 역사(役事)이니 사람을 원망하고 한울을 원망하나 이후부터는 한울이 귀화를 보여 원성을 내는 것이 없어지고 찬성으로 돌아가리라.(이후로 또 갑오년과 흡사한 사변이 있으리니 외국병마가 우리 강토 안으로 몰려들어 쟁탈하리라.) 갑오년과 같은 때가 도래해 갑오년의 일을 하면 우리나라 일이 이로 말미암아 빛나서 세계인민의 정신을 환기시킬 것”이라고 답했다.
‘갑오년과 흡사한 사변’이란 1904년 2월6일 일제가 불법적으로 경운궁(현 덕수궁)을 군사 점령한 ‘갑진왜란’(이것도 국사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다)을 가리킨다. ‘갑오년의 일을 하면’은 다가오는 왜란에 대해 겁내지 않고 항쟁에 나설 각오를 밝힌 것이다. 실제로 동학교도들은 갑진왜란 이후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과 국민군을 형성해 항일투쟁에 나섰다. ‘세계인민의 정신을 환기시킬 것’이라는 대목은 3·1운동이 중국 5·4운동, 인도·베트남·이집트 등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투쟁에 영향을 미친 것을 내다본 것이다.
◆기독교와의 종교경쟁에서 완승
황현의 <매천야록>을 보면 1899년 당시 기독교도를 4만명으로 기록한다. 반면 1907년에 법부대신 조중응이 이완용 총리(이들은 모두 나라 팔아먹은 ‘경술8적’에 속한다) 배석 아래 광무황제에게 동학교도들이 무려 200만명이나 된다고 보고했다(<고종실록> 1907년 7월11일자).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수십만명이 학살당한 뒤에 오히려 동학교세는 더욱 확대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3·1만세운동에서 동학교도가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원동력이 됐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 가운데 동학교도가 16명으로 기독교인 15명, 불교도 2명보다 많았다. 만세운동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동학 대표들을 많이 참여시키려고 한 것으로 풀이된다. 동학은 어떻게 기독교와의 종교 경쟁에서 이처럼 완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먼저 <용담유사> ‘권학가’의 한 구절을 보자. “우습다 저 사람은 저의 부모 죽은 후에 신도 없다 이름하고 제사조차 안 지내며 오륜에 벗어나서 유원속사(唯願速死;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람) 무삼 일고? 부모 없는 혼령혼백 저는 어찌 유독 있어 상천(上天)하고 무엇하고…”
이 말은 서학(기독교)의 언행불일치와 신학적 모순성을 예리하게 논파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귀신이 없다고 하면서 부모의 혼백을 추념하는 제사를 부정하고는 자신들은 사후 혼백이 돼 천당에 가고자 신을 믿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지적이다. 천당에 빨리 가기 바란다면 빨리 죽기를 바라는 꼴이므로 불합리한 데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현세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을 놀랍게 파헤친 것이다.
◆동학 성공비결은 ‘패치워크’
조선은 정조 사후 60년을 허송했다. 어린 순조가 등극한 1801년부터 대가 끊겨 한미한 가문 출신의 헌종과 철종(강화도 도령)을 거쳐 고종이 왕위에 오른 1863년까지다. 이 때 안동 김가가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공공성이 심각하게 훼손됐고 전국에서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 1811년의 홍경래난과 1862년의 진주민란이 대표적이었다.
‘잃어버린 60년’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흥선대원군의 권력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물결을 제대로 읽지 못해 ‘척화비’와 함께 10년을 또 허송했다. 고종이 친정에 나선 뒤에도 임오군란이다 갑신정변이다 해서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갑오왜란을 불러왔다. 50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외적에게 송두리째 빼앗긴 치욕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봄이 되면 새싹 파릇파릇 돋아나듯 대한민국은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41년 동안의 장기 항일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군사력이 약해 일제에 강점당했으나 그 정신은 죽지 않았고 지금 우리는 일본을 따라잡고 앞서려고 한다. 그런 투쟁과 발전을 뒷받침한 사상의 중심에 동학이 있다.
난세는 영웅을 낳고 혼란한 시대는 사상을 창조한다. 최제우는 ▲조선중기 정여립에서 개화한 대동사회를 꿈꾸는 개벽사상을 중심으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에서 ‘하느님’(한울님)의 한자어 ‘천주’라는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 ▲당시 백성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던 세도정치와 일제침략을 분쇄함으로써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保國安民)의 동학을 만들어 냈다. 당시까지 가장 앞선 사상의 장점을 받아들여 짜깁기(패치워크)함으로써 민중의 전폭적 지지를 얻었고 3·1운동과 항일투쟁의 사상적 토대를 만든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50호(2018년 7월25~3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