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 한동안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대한민국 건아들의 양궁, 야구, 그리고 배구를 보느라, 코로나19로 인한 피곤도 잊고 몇 주 지내왔다. 뜨거운 올림픽이 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왔다. 벌써 나는 걱정이 앞선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대선 후보들의 상대 후보에 대한 비상식적인 험담과 폄하를 다시 오랫동안 듣고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항상 그래왔지만, 이들의 언행은 우리 국민의 평균이자 내가 감추고 싶은 나의 민낯 수준이라 창피하다. 누가 과연 리더인가?
리더는 장엄하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을 오랜 고민을 통해 알아내고, 그 일을 대중에게 감동적인 연설로 설득하고, 대중과 함께 과업을 완수한다. 그(녀)가 비범한 이유는 당면한 문제를 남들보다 깊이 그리고 넓게 몰입하여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문제에 직면할지라도, 참신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일반인은 하나를 보았지만, 그는 자신만의 구별된 시간과 공간에서 심오한 삼매경으로 진입하여, 하나가 아니라 둘, 셋, 아니 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태권도 수련을 수년 동안 해온 사람과 같다. 초보자는 상대방의 공격에 대해, 한두 가지 품세로 방어하지만, 유단자는 가장 적절하고 간결한 품세를 알고 있기에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리더의 일상은 갈림길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주저하며 어렵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측근이나 대중으로부터 오해를 받는다. 그에게 분명하고 쉬운 해결책은 없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연결된 해결책이 공동체를 위한 최선이라고 우기지만, 리더는 모두가 양보할 수 있는 차선이나 차차선을 제시하고, 인내를 가지고 친절하게 대중을 설득한다.
리더의 주저와 오해를 잘 드러낸 시가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라는 미국 시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시를 낭송하였지만, 최근에 새롭게 읽었다. 오 행씩 네 단락으로 구성된 시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두 길이 노란 숲에 갈라져 있었다.
두 길 모두 갈 수 없어 섭섭했다.
한 길을 가야 한 여행자로, 한참 서 있었다.
나는 볼 수 있는 데까지 내려다보았다.
그 길이 덤불로 굽어져 가는 곳까지."(1-5행)
리더는 똑같이 좋아 보이는 두 길 중 한길을 택해야 한다. 그는 언제나 한길을 택해야 하는 궁지 속에서 산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한참 서 있기', 즉 주저다. 그리고 남들이 볼 수 없는 저 아래 가시덤불 굽어진 곳까지 볼 수 있는 인내와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 보이지 않는 곳에 해답이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런 가시덤불에서 신을 만났고 원효는 그런 동굴에서 깨우쳤다. 프로스트가 사용한 영어단어 'undergrowth'(덤불)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염두에 두지 않는 하찮은 장소다. 리더는 그 장소에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발견한다. 리더는 이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6-10행은 그 결단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 후, 나는 똑같이 좋아 보이는 다른 길을 취했다.
그 길이 아마도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풀이 많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내가 그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그곳으로 지나가는 것이 별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6-10행)
리더의 일상은 불확실한 선택의 연속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에게 중요한 덕목이 등장한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자기 신뢰가 있어야 한다. 미국 초월주의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 자신을 신뢰하십시오. 모든 심장은 당신의 강철 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전율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당신의 마음의 고결함보다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리더가 자신의 거울을 보고 '나는 나를 믿을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느냐다. 리더인 척 하는 사람들은 대중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인정이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그런 리더는 언제든지 무대에서 쫓겨날 수 있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리더는 오랫동안 갈고 닦은 심오한 안목을 통해,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제3의 길을 제시한다. 남들이 가본 적이 없는 길이다. 그가 그 길로 들어선다고 해도, 흔적도 남기지 않을 초행길이다. 그는 마침내 결정한다. 자신의 양심이 말하는 그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그는 새벽 여명에 일어나 마침내 그 길로 들어선다. 11행에서 15행은, 그 순교자적인 산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날 아침, 내 앞에는 두 길이 있었다.
낙엽엔 발자국이 없었다.
아, 나는 그 첫 번째 길을 다른 날을 돌아오기 위해 남겨두었다!
그러나 길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지기 때문에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11-15행)
자신이 선택한 길은 종말론적이다.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시간과 시간이 만들어낸 장소를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소아시아 에베소 철학자 헤라클리토스는 "만물은 강물처럼 다시는 담을 수 없이 항상 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되돌릴 수 없다. 그런 삶을 깨달은 자는 자신이 지금 걸어가고 있는 그 지금-여기를 '도'(道)라고 여긴다. 그런 삶을 구가하는 사람은 먼 훗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한숨 지며 말할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두 길이 한 숲에 갈라져 있었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바로 내가 사람들이 덜 간 길을 택했지.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16-20행)
나는 이 시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인생에 대한 찬양 시로 잘못 해석해 왔다. 오래전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사람들이 덜 간 길'을 택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것이 프로스트가 의도한 깨달음이 아닌 것 같다. 시인은 먼 훗날 우리에게 자신이 '사람들이 덜 간 길'을 선택했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하지만 그가 과거에 두 갈래 길에 왔을 때, 두 길은 '똑같이 좋아 보였다'라고 회상한다. '사람들이 덜 간 길'은 사실은 '똑같이 좋아 보이는 두 길' 중 하나일 뿐이다.
시인은 아마도 과거에 두 번째 다른 길이 아니라 '첫 번째 길'을 선택했을지라도, 미래에 그 길을 '사람들이 덜 간 길'이라고 확신하고 위안했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과거나 현재에 선택한 결과일 뿐이다. 이 시는 남들이 선뜻 취하지 못할 길을 과감히 선택한 개인의 성공 신화에 대한 찬양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선택한 삶이 최선이었다고 스스로 믿고 싶은 '자기 신뢰'에 대한 찬양이다.
우리가 선택한 길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문제는 우리가 선택한 길이 최선인지 아닌지 그 안목이 없다는 것이다. 안목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그 해답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부화뇌동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깊은 묵상을 통해, 어렴풋이 등장하는 양심의 소리만이 옳다. 나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진실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연주가는 대중이나 평론가의 간섭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의 선율이 그들의 닫힌 마음을 감동적으로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리더의 양심이며 나침판이다. 자기 신화는 '자기기만'과 다르다. '자기기만'은 보잘것없는 자신을 굉장한 자신으로 포장하여 남들에게 전시하려는 성급한 마음이다. 우리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가는 여행은 숭고하며 감동이다. 왜냐하면 그 여정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들도 자신들의 보물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리더는 자신에게 리더인 사람이다. 깊은 사고를 통해, 갈림길에서 자신의 혼을 담을 수 있는 선택을 감행한다. 자신에게 리더인 자가 대중에게도 리더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대선까지 그런 리더의 언행을 보고 싶다. 대한민국을 문화선진국으로 만들 리더는 등장할 것인가?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