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박수근 화백이 1965년 5월6일 별세했다. 사진은 강원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박수근미술관 풍경. /사진=양구군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박수근 화백이 1965년 5월6일 별세했다. 사진은 강원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박수근미술관 풍경. /사진=양구군

1965년 5월6일. 한국을 대표하는 서민화가 박수근 화백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51세.

전쟁과 가난을 겪은 박 화백은 한국 서민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화강암에 그림을 그린 듯한 독특한 질감과 당대 한국의 토속적인 풍경을 묘사한 그의 작품은 일찍이 외국인들에게 사랑받았다. 덕분에 그의 작품들은 가난했던 그의 생애와 반대로 한국 근현대사 작품 중 고가에 속한다. 2007년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는 45억2000만원에 낙찰되며 당시 국내 최고가 작품에 오르기도 했다.

박 화백은 화가로서 짧은 전성기를 누렸다. 백내장으로 왼쪽 눈이 실명된 박 화백은 한쪽 눈을 잃은 이후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965년 간경화 등으로 병세가 악화되면서 병원에 입원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같은 해 5월6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경기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묻혔다가 지난 2004년 4월15일 강원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박수근미술관으로 옮겨졌다.


한국의 밀레를 꿈꾼 강원도 산골 소년

박수근 화백은 빨래하는 모습 등 서민들의 일상을 그렸다. 그림은 박수근 화백의 1959년작 '빨래터'. /사진=머니투데이(가나아트)
박수근 화백은 빨래하는 모습 등 서민들의 일상을 그렸다. 그림은 박수근 화백의 1959년작 '빨래터'. /사진=머니투데이(가나아트)

"혼자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그림 그리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박수근 화백은 1963년 학원지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미술 시간이 어찌도 좋았는지 모른다"며 "제일 처음 선생님께서 크레용 그림을 보여주실 때 즐거웠던 마음은 지금껏 잊히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강원도 산골의 어린 소년은 프랑스 화가 장 프라수아 밀레를 동경했다.

일제강점기이던 1914년 2월21일 강원 양구군에서 태어난 박 화백은 일찍이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림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버리지 못했던 박 화백은 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독학 덕분인지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기법을 창조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18세인 1932년 외로운 노력 끝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수채화 '봄이 오다'로 입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박 화백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박 화백이 스물한 살 때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빚더미에 앉아 금강산으로 떠난다. 가족과 이별하는 시련 속에서도 그는 1936년 선전에서 '일하는 여인'으로 두 번째 입선한다. 그는 어떤 시련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림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박 화백은 부지런히 작품을 그려 9차례 입선에 성공한다.

이후 박 화백은 재혼한 아버지의 집에 갔다가 근처 빨래터에서 아내 김복순씨를 만나 사랑에 빠져 26세에 결혼했다. 김씨는 박 화백의 그림 모델 역할도 했다. 그는 박 화백의 '맷돌질하는 여인' 속 모델이기도 하다. 김씨는 '아내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박 화백과 자신의 일생을 기록했다.

그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듯했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박 화백은 가족들과 떨어져 피난길에 올랐다. 이후 어렵사리 가족과 재회했으나 끝없는 가난이 그를 괴롭혔다.

"미군 PX에서 초상화 그려가며"… 전쟁도 가난도 막지 못한 예술가

박수근 화백의 작품은 한국 근현대 작품 중에서도 고가에 속한다. 사진은 지난달 22일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한국 근현대미술 특별전 ‘시대유감’. /사진=뉴시스
박수근 화백의 작품은 한국 근현대 작품 중에서도 고가에 속한다. 사진은 지난달 22일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한국 근현대미술 특별전 ‘시대유감’. /사진=뉴시스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았음에도 전쟁통에 그림만 그리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박 화백은 미군 PX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 화가로서 힘든 시간이었으나 훗날 이 경험은 그의 인생에 큰 역할을 한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조그만 판잣집을 마련한 박 화백은 다시 그림에 전념한다. 이때부터 소박한 주제와 명확한 선의 윤곽, 명암과 원근감을 배제시킨 평면적 색채 등 '화가 박수근'만의 독특한 기법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국의 토속적인 풍경을 담아낸 그의 작품은 특히 외국인들에게 사랑받았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에게 박 화백의 그림은 고국으로 돌아가서도 한국의 정취를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향수였다.

미국 저널리스트 마가렛 밀러는 박 화백의 그림을 수집하고 주변에 소개하는 등 그의 열렬한 팬으로 유명하다. 밀러는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박 화백과 직접 편지를 주고받는 등 든든한 후원자이자 친구였다. 그는 196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되는 예술 잡지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화가'라는 제목으로 박 화백의 작품을 소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박 화백은 미군 PX에서 소설가 박완서와 연을 맺기도 했다.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만난 박완서 작가는 박 화백이 세상을 떠난 이후인 1970년 등단했으나 그가 박 화백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박 작가의 대표작 '나목'에 등장하는 화가 옥희도의 실제 모델도 박 화백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박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는 박수근이라는 이름으로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가 등장한다.

1970년대 이후 한국에서 박 화백의 작품이 재조명되기 시작하면서 지난 1980년 한국 정부는 고인이 된 박 화백에게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