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진 작가
조민진 작가

초등학교 때는 일기쓰기 숙제가 있었다. 선생님에게 보여주는 일기가 얼마나 일기다울 수 있었을진 의문이지만 아이들에게 글 쓰는 습관을 길러주기엔 좋은 방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일기를 썼다기보다는 글을 썼다. 일기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기에 숙제를 내기 위해 보여줄 수 있는 글을 쓰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독자를 겨냥한 글'이었다.

나만 보는 일기와 남도 읽는 글의 차이에 대해선 그때나 지금이나 대충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일기는 그야말로 내 맘이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된다. 도입이나 마무리, 논리적 전개를 뭣하러 신경쓰겠는가. 쓰다가 아무데서나 멈추고 노트를 덮어버려도 그만인 걸.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일기를 글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일기라면 그날의 경험과 생각, 감정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글은 단순 나열로 완성될 순 없다. 선택된 소재들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뒷받침하며 유기적이고 조화롭게 엮여야 한다. 그래야 읽는 이가 뭘 읽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를 위한 구성이 필요하다. 글의 밀도, 즉 내용의 충실함도 여기서 비롯된다.


아무튼 나는 글을 표방한 일기를 숙제로 내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선생님은 내게 친구들 앞에서 '일기 쓰는 법'을 발표하라고 했다. 복기해보자면 나는 대충 이런 요지로 말했다. "일기라고 그날 있었던 일을 일일이 다 쓸 필요가 없습니다. 꼭 자기 전에 써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쓰고 싶은 일이 생기면 어느 때고 상관없이 그것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자세히 기록하면 좋습니다." 지금 와서 그때 말을 보다 어른스럽게 포장하자면 나는 '선택과 집중'을 주장한 거였다. 오늘은 뭘 했고, 뭘 했고, 뭘 했다며 하루치 일들을 나열하는 보통의 일기들 속에서 나름 글의 주제를 살려보려고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했던 가상한 노력이 선생님한테 통했던 거였다. 늘 한 가지를 골라서 집중적으로 썼다. 어떨 땐 쓰고 싶은 게 많거나 아예 없었지만, 숙제를 위해 여러 개를 버리거나 하나라도 생각해냈다. 그렇게 일기를 쓰고 나면 어쨌거나 뿌듯했다. 내 하루가 그 하나의 일로 풍성해진 느낌이었다고 할까.

영국 런던 연수 시절 첫 책을 쓰게 된 비법이 있었다면 비슷했다. 하루에 딱 한 장의 사진만을 골라서 따로 보관해두는 거였다. '두 장도 안 되고 없어도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여행을 가더라도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자기 전에 여러 장 중에 딱 한 장만을 선택하는 수고를 자처했다.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뒤로 그렇게 매일 글감을 골라냈다. 사진을 보면 쓰려 했던 내용이 떠오르도록 차곡차곡 쌓아 뒀다. 특정 경험을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의미 있는 하나를 선택하려는 노력은 경험의 밀도를 덩달아 높였다. 자연스레 생각과 감정이 풍성해졌기 때문이다. 경험의 밀도가 높아야 글이 된다. 그렇게 책을 쓸 수 있었다.

혹시 지루한 시기를 겪고 있다면 무조건 '하루에 하나'를 골라보자. 꼭 일기나 글을 쓸 필요는 없다. 그저 오늘 하루 가장 기억할 만한 일을 선택해서 메모해 두는 걸로도 충분하다. 선택하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 어쩌면 선택하기 위해 걸맞은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선택력과 집중력을 기르려면 꾸준히 고르고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나는 일기를 쓰진 않지만 여전히 매일 하나를 꼽아 본다. 그게 글도 되고 책도 되고 무엇보다 작은 기쁨이 된다. 하루의 밀도를 높이고 재미를 찾는 나름의 꿀팁이다.


조민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