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법 개정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999년 농협과 축협을 통합시킨 통합 농협법이 제정된 이후 정부가 바뀔 때마다 ‘농협개혁’이란 명분 아래 개정돼 왔다. 그러나 아직도 농협 개혁은 미진한 채 ‘농협을 농업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목소리만 요란하다.
지금까지 비리 온상이라는 오명 속에 조합원의 소득증대에 기여하는 경제사업보다는 수지가 맞는 돈 장사에 치중하고 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아왔던 농협이다.
농협의 주인인 농민들의 바람은 단순하다. 돈 장사 잘하는 농협이 아니라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제때 제값에 팔아 주는 농협, 농약 비료 등 질 좋은 농자재를 싼값에 제때 공급해 주는 그런 농협을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이런 농협이 없는 걸까?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오렌지협동조합(썬키스트)이나 일본 농협 등의 성공사례를 들출 필요가 없다. 전남에 있는 아주 작은 농협은 생산한 농산물을 현대화된 생산설비와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시장에 적극 대응하면서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신용사업에는 꿈도 꾸지 않는다.
농협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농민이 바라는 농협을 가꾸고 이끌어 가고 있는 전남서남부채소농협을 통해 농협 구조조정의 해법을 찾아보자.
농가에 보너스 주는 농협
전남 무안 현경면에서 평생 양파와 마늘 농사를 짓고 있는 김생수(65) 씨.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운 농사일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 한눈 팔지 않고 농민으로 살아왔다.
도시 사람들은 은행 통장의 잔액이 늘어나는 걸 보면서 행복을 느낀다면 농부들은 가꾸고 일구며 땀 흘릴 수 있는 땅이 늘어나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김생수 씨 역시 매년 양파농사와 마늘농사로 땀 흘릴 수 있는 내 땅이 있기에 누구도 부럽지 않다.
근래에는 더 신나게 농사일을 하고 있다. 농민으로써 살맛 난다고 말한다. 김씨가 이렇게 신바람 나는 농사를 시작한 것은 1996년 전남서남부채소농협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나서부터다.
전남채소농협은 한해 동안 땀 흘리며 최선을 다해 재배한 양파를 모두 제값 주고 사간다. 또한 팔아서 이익이 생기면 조합원들에게 수익을 환원 분배해 준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보너스 같다. 어떨 땐 이 보너스가 더 많을 때도 있다.
전남서남부채소농협은 새로운 친환경 양파농사법을 매년 교육을 통해 알려준다. 안정적인 판매망도 확보해 조합원들이 판매 걱정 없이 생산에 전력할 수 있도록 도와주니 농민들로서는 더없이 고맙다. 예전처럼 상인들 농간에 휘말리지 않고 가격파동에 한숨 쉴 필요도 없어 주름이 늘어날 이유가 없다.
김생수 씨는 2009년 1만6500㎡ 양파 밭에서 90톤가량의 속이 꽉 차고 토실토실한 양파를 수확했다. 4500망(1망 20㎏)을 거둬들였다. 처음 농협과 2700만원에 계약했지만 시세가격에 맞춰 3200만원에 팔았다. 500만원이나 덤으로 수익을 챙긴 셈. 친환경 농사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농약 값과 인건비가 예년에 비해 절반밖에 들지 않는다. 그만큼 알찬 수익으로 돌아온다. 거기에다 1000만원의 보너스를 받았다. 전남서남부채소농협이 농산물을 판매해 수익이 생긴 만큼 조합원들에게 환원해 준 돈이다. 조합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보너스다.
신용사업 없이 승승장구하다
양파, 마늘 주산지인 전남 무안군 현경면 송정리에 자리한 전남서남부채소농협. 66㎡ 남짓한 조그만 사무실에는 13명의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사무기기와 집기들에 싸여 마땅한 여유 공간마저 없다. 이곳에서 지난 2009년 4만톤의 양파를 생산해 35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특히 매년 50억원 이상의 매출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그것도 신용사업 없이 오로지 농업유통사업만으로 벌어들였다.
전남서남부채소농협은 무안군을 중심으로 양파와 마늘을 생산하고 있는 농민들로 구성된 농협이다. 1993년 12월 지역 21개 영농조합법인이 뭉쳐 조직을 갖추고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젠 조합원 1100명에 달하는 번듯한 농협으로 자리매김했다.
전남서남부채소농협이 품목조합으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1996년에는 양파 판매매출이 24억6300만원에 그쳤다. 당시 순이익은 1억4000만원. 농협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품종개량과 설비자동화, 장비 기계화, 지속적인 교육 등을 통해 사업 성장을 이끌었다.
1995년 국내 최초로 자동소포장, 대포장, 자동선별기 등을 갖춘 ‘농산물 포장센터(APC)’를 건립했고, 1997년에는 양파 공동육묘장 및 프러그 육묘시설, 양파이식기, 양파수확기를 도입하는 등 양파농사의 기계화에 주력했다.
특히 저장성과 상품성이 떨어지는 저가의 기존 양파종자를 고품질 양파종자로 바꾸고 이를 전 조합원들에게 보급하는 한편 조합원교육관 등을 세워 조합원지도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또 대형유통업체와 직거래 사업을 시작하면서 지역 내 소상인들과 제휴해 공동출하를 시작했다. 그 결과 수도권 시장에서 가격 조절 능력을 갖게 됐다.
이런 노력은 오래지 않아 결실을 맺었다. 양파 계약 재배 면적을 지속적으로 늘려가면서 시장점유율을 높인 결과 점차 판매 매출이 늘어났고, 양파가격 파동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2배 이상의 매출신장세를 이어갔다. 2003년에는 양파만 팔아 237억8100만원의 대규모 매출을 올려 37억8000만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2006년도에도 35억원의 수익을 올려 내부 규정에 따라 15억 원을 조합원들에게 수익배당금으로 돌려줬다. 매출은 꾸준히 늘어 2007년 280억원, 2008년 300억원의 판매고를 올렸다. 2009년에는 350억원의 매출로 8억원에 가까운 이익금을 조합원들에 환원했다. 마늘 매출까지 포함하면 조합원들에게 환원되는 수익금은 한해 농사로 얻는 수익보다 더 많은 상황이다.
조합원들은 농협을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 물론 그것이 농협의 막강한 힘이 된다. 양파종자 구입 시 단체협약에 따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다. 거기에다 종자 판매업자에게서 15%에 달하는 유통이익까지 덤으로 받고 있다. 전에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유기농업에 필요한 미생물이나 영농자재들 역시 저렴한 가격으로 매입하고 있다.
농협은 매년 2월 양파재배농가와 계약재배에 따른 계약을 한다. 이때 계약금액의 30%를 지급한다. 재배농가로서는 영농자금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수매할 때는 농협이 전량 수매해 가면서 시세가격으로 계산해 주니 이래저래 남는 장사다. 지난해의 경우 1㎏에 300원으로 계약했지만 수매하면서 1㎏ 350원에 사들였다. 시세가격에 맞춘 것이다.
이처럼 농협이 제 역할에 충실하니 재배농가들은 마음 놓고 최고 품질의 양파만 재배하면 돼 매년 계약면적과 수매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05년 3만5119톤이던 생산량이 지난해에는 4만톤 이상으로 증가했다.
전남서남부채소농협의 역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양파농가들은 매년 가격파동으로 시름에 잠겨 얼마나 마음 고생했는지 잊을 수가 없다.
현재 전남서남부채소농협이 전국 양파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로 매우 미미하다. 하지만 양파만큼은 가격조절능력을 갖고 있다. 최고 품질의 무안양파가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농협을 중심으로 출하량을 조절해 적정한 양파가격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전남서남부채소농협은 앞으로 전국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15%(약 15만톤)로 높이기 위해 5개년 계획을 세워 추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95년부터 대만, 일본 등에 양파 수출을 시작해 이젠 미국, 유럽까지 수출 길을 뚫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농협중앙회로부터 업적평가 우수 기관으로 선정되는 등 수차례 표창장을 받았으며 지난해에는 산지유통핵심농협 최우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