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골프 약속이 있어서요. 내일 저녁에 통화하시죠."

새터민 김형덕 씨의 요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다. 김씨는 부인 유성희 씨와 슬하의 두 딸과 함께 올해 5월 제주도에 내려왔다. 그의 주 일과는 아이들을 돌보고 골프를 치는 것이다. 그의 38년 인생에서 요즘 같은 평탄한 시간은 없었다. 18년 전, 김씨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누구보다 험난한 인생을 살았다.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남도 속도전 돌격대원(청년 군인)으로 활동하던 김씨는 19살이 되던 1993년 북한을 탈출했다. 산속에서 열흘을 지내며 몸무게가 29kg이 될 만큼 피폐해진 상황도 있었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중국, 베트남, 홍콩을 떠돌다 1994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후 그의 삶은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2001년 탈북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국회의원 비서관을 지냈고, 대성그룹 기획팀을 거쳐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북한에 살던 시절부터 감옥에 다녀온 것도 수차례다. 남한에 와서도 북한의 가족을 보고 싶어 중국에 가려다가 국가보안법에 걸려 체포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새터민은 남한에 들어온 이상 해외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세대 재학시절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지 13년째다. 수화기 너머 들려온 김씨의 목소리에는 남한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여유로움과 당당함이 묻어났다.
 
 


◇ 남한에서 꾸린 새 가정

유씨는 대학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워낙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고 말한다.

"제 학창시절만 해도 반공교육을 하던 시기였어요. 하지만 다행히 북한에 대한 편견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탈북자라고 해서 호기심을 갖게 되다가 또래보다 매너 있는 모습에 호감으로 바뀌게 됐어요."
 
김씨는 아내의 따뜻한 모습에 마음을 열게 됐다.

“아내의 성품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모든 면에서 온화해서 배우자로 의지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만남을 이어가며 사랑을 틔웠다. 둘 사이에 자연스럽게 결혼 얘기가 오갔다. 하지만 유씨의 집안에서 탈북자인 김씨를 곱게 맞아줄리 없었다.

"아버지께서 보수적인 분이셔서 반대가 심했어요. 남편이 다른 문화에서 왔고 남한에 가족도 없어서 정착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였죠. 하지만 제가 끝까지 좋다고 하자 결국 저희 결혼을 허락하셨어요."

김씨가 남한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남한 사람의 도움도 있었다. 특히 화평교회의 안만수 목사는 김씨의 양부가 되어주었다. 더불어 안 목사의 자녀들은 김씨의 형제가 됐다. 안 목사는 김씨가 결혼할 때도 장인어른을 설득시킨 장본인이었다. 외로운 남한 생활에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이다.  
 

 
◇ 아이들 교육은 아빠 몫  

경제활동은 아내 몫이다. 유씨는 KICPA(공인회계사)를 취득하고 한국전력공사 회계팀에서 일해 가정의 경제는 어려움이 없다. 김씨는 현재 북한관련 기고를 쓰는 등 프리랜서로 일하며 평소에는 두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교육은 김씨가 전담한다. 그는 "공부할 수 있는 힘도 체력에서 나온다"며 아이들에게 공부를 더 가르치기 보다 아이들과 함께 운동을 많이 한다. 수영, 스노보드, 스케이트, 자전거 타기는 평소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운동이다.
 
“제 교육원칙이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는 거예요. 대신 1시간씩 꼭 책을 읽게 하죠. 이제는 습관이 돼서 아이들이 더 좋아합니다.”
 
아내 역시 남편의 교육 방식에 전적으로 찬성이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더 시키려고 하기보다 인성과 체력을 기르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남편의 교육 방식에 100% 이상 만족해요. 여자 아이들은 자랄수록 아빠와 교류할 기회가 없잖아요. 우리 아이들은 아빠와 관계가 좋아서 사회성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올해 추석은 온 가족이 제주도에서

어느덧 남한에서 맞는 18번째 추석이다. 김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이 그립지 않느냐는 질문에 탈북 이후 중국에서 2번 정도 가족을 만났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래도 가족을 생각하면 애틋하다. 탈북할 때 아버지를 모시고 나오지 못한 것이 늘 머릿속에 맴돈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못 뵌 게 가장 아쉽죠. 중국에서 만난 누님은 탈북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북한 보위부가 집 주변을 지켜도 북한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하네요.“
 
그는 2005년에는 중국 주재 북한 대사관에 고향방문을 신청하기도 했다. 단순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은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수많은 새터민이 자유롭게 북을 오갈때 경색된 남북관계도 진전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향민을 위해서라도 제가 용기를 내야죠. 북한을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북한의 인권은 안타까워하되 균형 있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올해 추석은 처가 식구들과 함께 보낼 예정이다. 김씨 가족이 제주도로 내려온 것을 기념해 방문하는 것이다. 김씨는 제주도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대접할 기회가 자주 생긴다고 말한다. “그동안 빚지고 살았으니 이제는 갚아야 할 때”라는 김씨의 말에 한가위 같은 넉넉함이 엿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