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렸다 내렸다 가격정책 기준이 뭡니까? 한국 소비자는 봉?"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BAT코리아는 기획재정부에 현재 1갑당 2700원인 보그(vogue)의 가격을 지난 12일부터 2500원으로 인하하겠다고 신고했다. 지난해 4월 말 BAT코리아가 담배 가격을 갑당 200원씩 올린 이후 1년이 채 안돼 내려진 결정이다.


그러나 가격 인하 결정에도 불구하고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던힐 등 주력제품은 제외하고 최근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슬림담배인 보그 제품의 가격만 내린 탓이다. 비난 여론을 일시적으로 무마하기 위한 '생색내기용 가격인하'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사진 류승희기자
 
◆"올릴 땐 언제고…상술이 얄미워"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보자. 지난해 6월 담배업계에는 "앞으로 1~2개월만 던힐, 보그 안 사면 가격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돌았다. 판매량 급감에 놀라 BAT 영국 본사쪽에서 가격 재조정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판매 추이에 따라 지속적으로 판매량이 급감하면 본격적인 가격 인하 논의를 진행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뒷얘기도 전해졌다. 그동안 BAT코리아 측에서는 "본사 권고는 사실무근이다"고 부인해왔다.
실제로 BAT코리아가 지난해 가격 인상을 발표한 직후 판매량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편의점 업계 담배 판매 추이에 따르면 5월 한달 만에 던힐은 전년 동월 대비 무려 31%나 급감했다. 보그 역시 15.2%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인상 전인 지난해 3월 보그의 시장점유율은 1.21%였던데 비해 최근 2월 점유율은 0.78%. 무려 35.5%나 폭락해 BAT로서는 위기 의식이 컸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지난해 BAT코리아가 담뱃값을 인상하자 다른 외국산 담배업체들도 줄줄이 가격 인상에 동참했다. 마일드세븐을 판매 중인 JTI코리아는 BAT코리아와 비슷한 시기인 지난해 4~5월 제품 가격을 200원씩 올렸고, 불과 한달 전인 2월에도 말보로와 팔리아멘트를 판매 중인 필립모리스코리아(이하 PMK) 역시 담뱃값 200원 인상을 발표했다.

이처럼 국내에 들어온 외국계 담배회사들이 모두 가격을 인상하자 1인 시위를 비롯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에 대한 외국산담배업체의 항변은 여지없이 똑같았다.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의 상승을 감안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이다.


2500원짜리 담배 1갑을 기준으로 보면 담배소비세, 교육세 등 부과되는 제세·기금은 62% 수준이다. 여기에 판매자 마진 10% 안팎을 제외하면 제조업자 몫은 28% 정도다. 세율 비중이 큰 담배의 경우 통상적으로 정부의 제세·기금 인상수준에 따라 가격이 결정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가격 인상을 단행한 이들 업체를 향한 국내 소비자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더욱이 외국계 담배업체들은 모두 국산엽과 비교해 절반 가격인 수입 잎담배를 사용하고 있어 이들의 가격인상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에서 세간에 떠돌던 우스갯소리가 1년여만에 현실이 된 셈이다. 그러니 이번 가격인하를 바라보는 소비자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업계 한 관계자는 "지난 1년간 한국 소비자를 저울질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냐"며 "그동안 스스로 내세워왔던 가격 인상 이유를 스스로 부정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2월부터 5월까지 보그 판매량 2500만갑에 대한 소비자들의 원성도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분위기다. 이를 바탕으로 소비자가 추가로 지불한 금액을 환산하면 약 50억원 정도. BAT코리아의 일방적인 가격 정책에 따라 한달 사이에 더 비싸게 담뱃값을 지불한 소비자들만 억울하게 된 셈이다.  
 
 

 사진=류승희기자
 
◆슬림담배 인기 편승, 매출 낮은 제품으로 '생색내기'  
던힐 등 주력종목을 제외하고 보그만 가격인하를 결정했다는 것도 의구심을 품게 한다.

BAT코리아는 지난해 7월 던힐 스위치를 출시하며 이미 한차례 가격을 3000원에서 2800원으로 200원 낮춰 출시한 바 있다. "던힐 스위치를 아끼는 소비자들의 가격 부담을 덜기 위한 것"이라는 게 당시 BAT코리아의 설명. 그러나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비난 여론을 의식해 상대적으로 점유율이 낮은 제품의 가격을 내려 물타기를 시도한 생색내기 아니냐"는 냉담한 반응이 쏟아졌다.

이번 보그의 가격인하 역시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내 담배시장에서 꾸준히 점유율 2위를 고수하던 BAT코리아가 가격 인상 후 냉담해진 시장 반응을 반전시키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BAT코리아가 가격을 올리기 전인 지난해 3월 56.5%였던 KT&G의 시장점유율은 반사이익을 얻으면서 올 1월 60.3%로 올랐고, 업계 3위였던 필립모리스코리아의 점유율은 같은 기간 17.4%에서 22.7%로 올랐다. BAT코리아의 점유율은 18.4%에서 10.7%로 크게 떨어지며 3위로 밀려났다.

이 같은 상황을 뒤집기 위해 최근 프리미엄 담배 시장의 확산과 함께 급성장 중인 슬림담배를 '히든 카드'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슬림 담배의 인기에 편승해 매출 비중이 낮은 보그를 시범적으로 가격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며 "다른 인기 제품의 가격을 올릴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점유율이 낮은 제품의 가격을 내리니 생색내기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지난 2005년 출시한 BAT코리아의 대표적인 슬림담배인 보그는 출시 후 국내 인터내셔널 슈퍼슬림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담뱃값 인상 이후 판매율이 급감, 현재 BAT코리아에서 판매되는 제품들 중에서 브랜드 매출 비중이 1%도 안 되는 형편이다. BAT코리아 측은 "시중에 나와 있는 슬림 담배의 가격이 2500원이기 때문에 이에 맞춰 보그만 가격을 내린 것"이라며 "던힐 등 다른 제품의 가격 인하 계획은 없다"고 못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