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총재가 금융완화 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인플레이션 2~3%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의 엔/달러 환율 상승, 즉 엔화 가치 하락은 일단 단기 추세로 전망된다. 월봉 차트에서 엔/달러 환율은 2002년의 고점으로부터 10년 동안 꾸준히 내려오면서 엔화 가치 상승이 대세였다.
엔고 현상을 확연히 드러내 온 장기차트만 본다면 근래의 엔화 가치 하락은 장기 추세선상에서 가끔 나타나는 일시적인 되돌림 모습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펀더멘탈상 새로운 큰 추세의 전환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다.
엔고 현상은 1985년 9월, 선진 5개국(G5)인 미국·독일·프랑스·일본·영국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여서 맺은 정책협약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 협약에서 일본과 독일은 엔화와 마르크화의 평가절상을 유도하기 위해 소위 '플라자합의'에 서명했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개선시키기 위해 달러 가치 하락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80년대 초반에 있었던 오일쇼크 이후 기름이 많이 들어가는 미국 대형 자동차업체들이 고전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우수한 품질의 소형차로 미국의 자동차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미국의 청년들은 토요타, 혼다와 같은 일본 소형차를 가지는 것을 꿈으로 여겼다. 일본은 미국에 대한 수출로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컸기 때문에 미국에서 요구하는 환율절상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엔/달러 환율은 플라자합의 직전의 240엔 수준에서 플라자합의 이후 3개월 만에 200엔, 3년 후인 1988년에는 120엔대까지 크게 하락했다.
당시 주요 수출품에서 일본과 경쟁하는 입장인 한국으로서는 엔화 절상으로 상대적인 가격 경쟁력을 얻어서 저금리·저유가·저달러의 3저 호황을 누리게 됐다. 일본 역시 수출이 국부를 늘리는데 큰 기여를 하는 국가로서 엔화 가치가 빠르게 올라감에 따라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됐고 일본 중앙은행은 기업들의 이자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정책금리를 대폭 낮추는 저금리 정책을 펴나갔다. 저금리는 엔화의 평가절상으로 환차익을 얻으려는 핫머니가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시중의 유동성 자금은 저금리로 인해 부동산 쪽으로 많이 흘러들었고 급기야는 거품까지 생겨났다. 극심한 거품이 꺼지면서 90년대의 장기불황인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에서 나타났던 거품의 정도와 장기침체의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 한국에서도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이 올 것이라는 말을 쉽게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일본 제조업의 영업이익률은 1960년대 7.5%였는데 1990년대, 2000년대에 3%대로 주저앉았고 2008년, 2009년에는 사상 최초로 1%대에 그쳤다. 한국은 2009년 1분기에 4.7%였고 올해 1분기에는 5.2%였다.
◆미국 자존심 건드린 日 환율 절상 전략
일본은 엔고현상이 지속될 때 환율 절상 압력에 대한 금융산업의 경쟁력은 제대로 키우지 않은 채 해외부동산을 대규모로 사들였다. 소니사가 컬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하고, 미쓰비시가 뉴욕 록펠러센터를 사들인 것은 미국인의 자존심까지 건드렸다.
전성기에 사들였던 해외 대규모 부동산의 상당수는 훗날 매각하게 됐으며 그 유명한 '페블비치골프장'을 구입했던 일본인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 11월9일 소니의 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정크) 등급보다 겨우 한단계 위인 'Baa3'로 강등했고, 소니의 주가는 32년 만에 최저치로 내려왔다. 과거 전세계 사람들이 꼭 갖고 싶어 하던 전자제품이 소니 워크맨, 소니 TV 등 소니의 제품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글로벌기업들이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는 소식 역시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다만 전문부품기업들은 오히려 도약해왔고, 화학기업들이 한국보다 높은 수준에서 선도하고 있는 기술력은 우리가 여전히 배워야 한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는 있다.
플라자합의 이후 엔/달러 환율은 계속 내려와서 1995년 4월에는 80엔 밑까지 떨어졌다. 이처럼 달러가 약세를 이어갔음에도 미국은 경상적자가 줄어들지 않자 경상수지를 맞추려는 의지를 버리고, 자본수지 흑자를 통해 경상수지 적자를 보전하려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결국 선진 7개국(G7)은 세계경제 안정이라는 목표 하에 달러가치를 부양하는 '역플라자합의'를 했다.
역플라자합의는 한국과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이후 달러가치의 상승 전환과 더불어 엔/달러 환율은 2002년 초까지 상승했다. 이 시기의 엔저 현상은 계속 대세로 굳어지지 못하고 엔/달러 환율은 135.0엔에서 2011년 10월에 75.6엔까지 내려왔다. 최근 엔/달러가 6개월만의 최고치인 80엔을 넘어섰지만 10년간 하락한 것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다.
일본경제는 1970~1990년 20년 동안 연평균 9.6% 성장한 반면, 이후 20년 동안은 연평균 0.3% 성장에 그쳤다. 국가경제 기초체력을 나타내는 잠재성장률도 1980년대까지는 4%를 넘었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1% 수준에 불과했다.
1000조엔으로 늘어난 국가부채, 200%에 달하는 국가부채비율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에서 가장 높은 상태다. 이러한 국가 경제성장률 추이와 재무적 상태를 본다면 미국의 보호무역이 변수이긴 하지만 일본경제의 펀더멘탈 상 다시 엔화 강세로 돌아서기 힘들 수 있다.
금융위기와 유럽재정 위기 등은 세계에서 대표적인 안전자산인 엔화를 투자자들이 선호하게끔 만들어 엔화가치가 과도하게 높게 유지되는데 일조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장기간 지속돼 온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엔화가치 하락이 불가피하다. 금리인하로는 경기부양이 힘든 상황이며 엔화가치 하락으로 수입물가를 상승시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
최근 오카무라 타다시 일본 상공회의소 회장이 아베 총재에게 "엔 시세를 바로잡기 위해 모든 정책을 총동원해달라"고 요청한 것도 엔/달러 환율의 기조적인 상승에 무게를 두게 한다.
◆투자자 엔저·원고 현상 대비해야
한국의 원/달러 환율은 최근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다른 아시아통화와 마찬가지로 원화도 위안화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위안화 가치가 1% 오를 때에는 원화가치가 1.1% 오르는 경향을 보인 반면, 달러화 가치가 1% 오를 때의 원화가치는 0.22% 내리는데 그쳤다(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2012년 10월).
위안화 가치의 지속적인 상승은 원화가치의 상승으로 이어져 원/달러 환율이 좀 더 내려갈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원/달러 환율이 과도하게 높게 올라갔기 때문에 다른 아시아 주요국들과 비교하면 앞으로 더 내려갈 여지가 있다. 태국, 대만,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의 달러대비 환율은 이미 금융위기 이전보다 훨씬 낮은 수준까지 내려와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금융위기 이전보다 높은 상태다.
그렇다고 고환율이 유지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한국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아니다. 금융위기 이후 오히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더 올라갔고 한국 제품의 인지도와 세계 시장점유율은 더 늘어났다. 외국자본도 한국으로 많이 들어왔다. 금융위기 이전에 비해 달러가 한국 안에 늘어날 요인이 있었음에도 원/달러 환율은 오히려 더 높은 상태다.
엔화 대비 원화가치를 보면 원/엔 환율은 원/달러 환율을 엔/달러 환율로 나눈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면서 엔/달러 환율이 상승하는 것은 원/엔 환율을 더욱 확실하게 내려가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즉 엔저현상에 원고현상이 겹치면서 원/엔 환율이 하락을 지속한다면 투자자로서는 그에 맞는 투자를 생각해볼 수 있다.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를 팔고 서울에서 달러를 파는 교차거래로 환차익을 추구할 수 있다. 일본의 금리가 아직은 낮기 때문에 엔화를 빌려서 제3국에 투자했다가 나중에 되갚는 방법으로 이자를 얻은 것에 덧붙여서 투자기간 동안 엔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환차익까지 얻을 수 있다.
외환을 직접 거래하는 것이 곤란한 일반 투자자라면 원/엔 환율 하락으로 수혜를 입는 기업의 주식에 투자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엔화부채가 많은 기업은 갚아야 할 원화 금액이 줄어들어 환차익이 생겨난다. 한국전력, 포스코, 현대제철, 롯데쇼핑, 롯데제과, 대한항공, 켐트로닉스, 비에이치아이, 원림 등이 대표적인 기업이다.
롯데쇼핑은 지난해 7월 5억달러 규모의 원화표시 달러 전환사채와 325억엔 규모의 원화표시 엔화 전환사채를 발행했는데, 이후 원/달러 환율과 원/엔 환율이 모두 내려가면서 갚아야 할 부채가 조달금액 이하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같은 롯데그룹 계열사인 롯데제과도 원화표시 엔화사채를 쓰고 있다.
엔화부채에서 엔화자산을 뺀 '엔화 순부채 원화환산액'을 지난 반기 기준으로 살펴보면 포스코, 현대제철, 비에이치아이의 엔화 순부채는 각각 2조2000억원, 5000억원, 310억원으로 시가총액의 8%, 7%, 9% 수준이다. 한국전력과 켐트로닉스는 엔화 순부채가 각각 3조1000억원, 360억원으로 시가총액의 18%, 34%에 달해 주가 측면에서 더 큰 수혜를 얻게 된다.
특히 원림은 엔화 순부채가 333억원이면서 시가총액은 205억원에 불과해 원/엔 환율 하락의 수혜를 상대적으로 가장 크게 얻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의 수입 비중이 높은 기업은 원/엔 환율 하락 시 영업이익에 긍정적 효과가 생긴다. 이런 기업으로는 두산인프라코어, 화천기공, 로체시스템즈, 넥스턴, 삼익THK, 현대위아, 엘엔에프 새론오토모티브, 한국정밀기계 등이 거론된다(신한금융투자 투자분석부).
반면 해외시장에서 주력제품이 일본과 수출 경합 중인 한국 기업은 엔저로 일본 제품의 달러 환산 수출가격이 낮아지고 한국 제품의 달러 환산 수출 가격이 높아지면 가격경쟁력에서 불리해지는 부담이 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5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