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절차가 마지막 관문인 국회 심의만 남겨둠에 따라 재계의 고군분투가 예상된다. 노동계의 단결권을 대폭 강화한 정부안이 그대로 통과될 경우 노사관계의 균형추가 노동계로 기울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재계는 경영계의 방어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될 수 있도록 국회 논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겠다는 각오다.
◆속도 내는 ILO비준, 재계는 반발
정부는 지난달 말과 이달 초 국무회의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안과 이를 위한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잇따라 의결하고 국회에 제출했다. 지난 5월 말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올해 정기국회에서 ILO 3개 협약의 비준 동의안과 관련 법안이 함께 논의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밝힌지 4개월여 만이다.
당초 정부는 관련법과 제도개선을 먼저 마무리한 후 비준을 추진하려 했지만 올해 비준과 입법을 동시추진하기로 노선을 선회했다. 유럽연합(EU)과 ILO 핵심협약 비준을 올해까지 마무리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 지난 5월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9 세계노동절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ILO 핵심협약을 조속히 비준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영환 기자 |
우리나라는 앞서 1991년 ILO에 가입했지만 ILO가 정해놓은 핵심협약 8개 가운데 결사의 자유 87호와 98호, 강제노동 금지 29호, 105호 등 4개를 비준하지 않았다. 국내 노동법과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별다른 진전이 없던 ILO 핵심협약 비준은 2010년 EU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당시 우리나라 정부가 FTA 체결 조건으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한 것이다. 기한은 올해 4월까지였다.
하지만 노사 간 이견이 평행선을 달리며 비준안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EU가 이를 문제 삼아 분쟁절차를 밟기 시작하자 정부가 서둘러 안건을 마련해 비준 추진에 나선 것이다.
문제는 정부안이 실제로 국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현재 제출된 정부입법안에 대한 재계의 반발이 워낙 거세기 때문이다.
정부안은 실업자와 해고자, 퇴직 공무원과 교원, 소방 공무원, 대학 교원, 5급 이상 공무원 등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노조 전임자 급여 지급 금지 규정도 삭제했으며 사용자가 개별교섭에 동의하는 경우 모든 노조에 대한 성실 교섭 및 차별금지 의무를 부여했다.
물론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사업장 일부 또는 전부를 점거하는 쟁위 행위를 금지하도록 하는 등 몇가지 제한사항을 두긴 했다. 그러나 재계는 정부안이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단결권만 대폭 강화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해고자·실업자의 기업별노조 가입 문제, 노조전임자 급여지급 금지조항 삭제와 근로시간면제제도 관리규제 완화 문제는 노조에 힘 쏠림 현상을 더욱 강화시키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노사관계의 자주성과 도덕성 차원에서도 불합리성을 높일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측 방어권 인정해 노사 균형 맞출까
재계는 정부안이 그대로 통과될 경우 노사 간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경총 관계자는 “한국 노사관계는 다른 나라와 달리 기업별노조 중심의 틀 속에서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대립·투쟁적이고 폭력적이며 불법적인 노동운동 관행으로 고비용·저생산성의 산업구조에 봉착한 상황”이라면서 “정부안대로 해고자·실업자 노조 가입이 허용된다면 자동적으로 노조의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도 보다 강화되고 활성화돼 기업들의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반드시 사측의 방어권을 보장할 수 있는 내용을 안건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재계의 요구안은 ▲대체근로 허용 ▲부당노동행위제도 개선 ▲사업장 내 쟁의행위 금지 ▲쟁의행위 찬반투표절차 보완 등이다.
현재 우리나라 법은 대체근로를 전면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사업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계는 이를 삭제해 대체근로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사용자의 정당한 징계나 노무관리, 단체교섭에도 노조가 사용자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부당노동행위를 이슈화해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사례가 있으므로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을 폐지하고 노조 부당노동행위를 신설할 것을 주장한다.
이와 함께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선진국이 사용자의 재산권, 점유권, 영업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노조의 직장점거를 불법으로 규정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사업장 내 쟁의행위를 금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외에 노조의 쟁의행위 찬반투표 방식 및 기간, 유효기간 등 투표 절차에 관한 규정을 강화해 파업기간의 예측가능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추광호 한국경제연구원 일자리전략실장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인정하고 있는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쟁의행위 시 직장점거 전면 금지, 쟁의행위 찬반투표 절차 개선 등 사용자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노사 간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며 “국회에서 우리나라의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해 노동계의 단결권과 경영계의 대항권이 균형을 이루는 노동조합법 개정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14호(2019년 10월15~2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