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자는 아이를 깨웠다(‘잠 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의 일본식 표현).”
올 초 일본 아사히신문이 한국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육성정책에 이례적으로 내린 평가다. 일본의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 규제를 계기로 촉발된 한국의 ‘극일’(克日) 행보가 예상보다 체계적이고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 위기감을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 소부장 육성정책을 추진한 지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고 있다. 시작은 일본이 최초로 칼끝을 겨눴던 반도체 소재다. 정부와 기업의 합심아래 ‘메이드 인 코리아’를 새긴 한국산 반도체 소재가 본격적인 양산을 앞뒀다. 한국에 반도체 소재 수출을 제한하면 경제는 물론 정치·외교부문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란 일본의 판단이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다.
순풍에 돛 단 ‘극일’ 행보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SKC는 올 하반기 반도체용 하이엔드급 블랭크마스크 시제품을 본격 양산하기로 하고 현재 국내 수요기업과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블랭크마스크는 반도체 웨이퍼에 회로를 새길 때 사용하는 포토마스크의 원재료다. 쿼츠 위에 금속막과 감광막을 도포해 만든다. 여기에 회로 패턴을 형상화하면 포토마스크가 된다. 필름으로 치면 촬영 전 필름이 블랭크마스크, 촬영 후 필름이 포토마스크다. 포토마스크를 반도체 웨이퍼 위에 놓고 빛을 쏘면 빛이 통과한 부분에 화학반응이 일어나 회로가 된다.
블랭크마스크 시장 규모는 2018년 8000억원에서 2025년 1조3000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업계는 전망했다. 현재 시장의 95%를 일본이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 역시 블랭크마스크의 90% 이상을 일본으로부터 조달한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대일본 수입 상위 20대 핵심 소부장품목 중 하나가 블랭크마스크다.
블랭크마스크 국산화 배경에는 SKC의 기민한 투자와 정부의 과감한 지원이 있었다. SKC는 2018년부터 총 430억원을 투자해 블랭크마스크 신규공장을 2019년 말 완공해 양산기반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환경부와 고용노동부는 화학물질 취급 인·허가와 유해방지계획, 공정안전관리를 신속하게 진행했다는 게 산업부 설명이다. SKC는 하반기 양산할 블랭크마스크 품목보다 한 단계 더 뛰어난 첨단제품을 내년 양산 목표로 개발하고 있다.
이용선 SKC 부사장은 “정부가 신규 공장 완공에 필요한 환경 등 인·허가 신속처리, 수입장비 할당관세 적용과 정부 R&D(연구개발) 등을 적기 지원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며 “국내 기업들이 소부장 정책의 추진동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소부장) 협력모델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소부장 경쟁력 강화 지속
블랭크마스크 외에 주요 반도체 핵심소재의 경쟁력 강화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한·일간 무역분쟁 촉발의 원인이 된 일본의 3대 수출규제 품목은 연내 완전한 공급 안정화를 목표로 민관의 집중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앞서 일본은 지난해 7월 ▲불화수소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이 재래식 무기에 전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한국에 대한 수출을 금지했다. 3개 품목 모두 일본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70% 이상이어서 공급처 다변화와 국산화의 중요성이 커지자 정부는 지난해 8월 ‘소부장 경쟁력 강화 대책’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2022년까지 5조원을 투자해 100대 핵심 전략품목을 선정, 집중 육성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특히 불화수소, EUV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 등 3대 품목에 대한 우선 투자 계획이 담겼다.
기체 불화수소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태양전지의 제조공정에서 사용되는 세정가스인 삼불화질소(NF3) 기술력을 가진 SK머티리얼즈가 양산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수요업체들과 시제품을 테스트 중이며 빠르면 5월 중 양산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SK머티리얼즈는 최근 금호석유화학의 전자소재사업을 400억원에 인수하며 포토레지스트 소재 시장 진출도 추진키로 했다. 금호석화는 EUV용 포토레지스트 관련 자체 특허를 보유하고 있어 앞으로 소부장 국산화에 기여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양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정부는 지난 1월 미국 듀폰의 EUV용 포토레지스트 생산시설을 충남 천안에 유치하는 데 성공하며 일본 제품을 대체할 공급기반을 마련했다.
불화폴리이미드는 코오롱인더스트리가 7.3인치 패널 기준 연산 3000만장 규모의 생산체제를 갖췄으며 지난해부터 양산을 시작, 해외에 일부 수출 중이다. 정부는 앞으로도 차질없는 소부장 경쟁력 강화를 이어갈 방침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현재 소부장 정책을 통해 육성하려는 100대 품목은 전략 품목이어서 구체적인 리스트를 밝힐 수는 없지만 관련업계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육성하겠다”고 강조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42호(2020년 4월28일~5월4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