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의 출범과 이에 따른 미·중 통상관계의 재정립 등으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계제로’의 상황이 지속될 전망이다. 최근 주요 기업이 연말 인사와 조직개편을 예년보다 앞당겨 시행한 것도 이 같은 불확실성에 선제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이번 연말 인사의 공통된 키워드는 ‘세대교체’·‘안정 속 쇄신’·‘여성’이다. 주요 기업의 경영 무게추가 오너 3~4세로 이동하는 동시에 성과주의를 기반으로 40~50대 젊은 임원을 경영일선에 전진 배치하거나 요직에 신규 선임하는 경향이 강화됐다.
코로나19로 인한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상황을 감안해 체제 자체를 뒤흔들진 않지만 시기를 앞당긴 ‘깜짝 인사’와 주요 보직 변화 등으로 안정 속 쇄신을 꾀했다. 여성 임원의 발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성별에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중용해 다양성을 강화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는 의지로 읽힌다.
오너 3~4세, 4050 임원 약진
올해 인사에서는 오너 3~4세대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10대 그룹 가운데 가장 먼저 인사를 단행한 한화는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전략부문장을 부사장 승진 1년 만에 사장으로 승진시키며 3세 경영의 포문을 열었다. 차남인 김동원 한화생명 최고디지털전략책임자(CDSO)도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하며 책임이 한층 강화됐다.GS그룹은 오너 4세인 허철홍 GS칼텍스 상무를 전무로 승진시켰다. 허주홍 GS칼텍스 상무보와 허치홍 GS리테일 상무보도 나란히 상무로 승진하면서 4세 승계를 위한 정지작업이 본격화됐다는 해석이다.
LS그룹 역시 이번 정기인사에서 오너 3세인 구본혁 예스코홀딩스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해 최고경영자(CEO)로 선임됐고 구본규 LS엠트론 부사장도 CEO로 발탁됐다. 또한 구동휘 LS 전무가 E1으로 이동해 최고운영책임자(COO)에 선임되는 등 오너 3세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이 외에 코오롱그룹도 이웅열 전 회장의 장남 이규호 전무가 부사장으로 선임됐다.
현대차그룹은 15일 단행한 인사에서 ▲장재훈 현대차 사장 ▲조성환 현대모비스 사장 ▲윤영준 현대건설 사장 등 50대 CEO를 전진 배치했다. 이와 함께 40대 인사를 대거 신임 임원 명단에 올렸다. 내연기관을 벗어나 미래 모빌리티로 전환을 서두르는 현대차가 젊은 인재를 앞세워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SK그룹 역시 57세인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이 SK하이닉스 부회장직을 겸하게 했으며 40대인 추형욱 SK주식회사 투자1센터장을 SK E&C 사장에 앉혔다. LG그룹은 지난달 발표한 신규 임원 124명 가운데 24명이 45세 이하이며 이 중에는 올해 40세인 1980년생도 포함됐다. 신규 임원 중 1970년 이후 출생 비중은 올해 70%에 달한다.
안정 속 쇄신으로 미래 준비
기업들이 이번 인사에서 대체적으로 안정 속 쇄신을 택한 것도 특징이다. 완전히 새롭게 판을 갈아엎기보다는 이미 검증된 큰 틀을 유지하되 변화를 준 것이다.삼성전자의 경우 이번 인사에서 ▲김기남 DS부문장(부회장) ▲김현석 소비자가전(CE)부문장(사장) ▲고동진 정보기술·모바일(IM)부문장(사장) 등 3인 대표이사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대신 부사장 이하 임원 승진자를 214명 배출하며 쇄신을 꾀했다. 삼성전자의 올해 인사 규모는 2017년 221명 이후 3년 만에 가장 많은 수준이다. 또한 경영 일선에선 DS부문 산하 메모리부문장과 파운드리부문장을 교체하며 종합반도체 1위 비전 달성에 추동력을 실었다.
SK그룹의 경우 조대식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3연임하고 대부분의 계열사 CEO가 자리를 지키며 안정을 택했다. 대신 최태원 회장이 줄곧 강조해온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강화하기 위해 수펙스추구협의회 내에 에너지·화학위원회를 없애고 환경사업위원회를 신설한 뒤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을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아울러 ▲바이오 소위원회 ▲AI(인공지능) 소위원회 ▲DT(디지털전환) 소위원회 등을 산하에 운영해 미래 먹거리 개발에 힘을 싣도록 했다.
LG 역시 하현회 LG유플러스 부회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열사 CEO를 유임시키는 등 최고경영진은 안정 기조를 유지했다. 대신 사장 승진자를 지난해 1명에서 올해 5명으로 확대하며 미래 CEO 후보군을 넓혔다. 코로나19 등으로 인한 국내외 경영환경의 불확실성 증가에 대비해 경영의 안정성을 도모하는 등 신·구의 조화를 통한 ‘안정 속 혁신’에 중점을 뒀다는 평가다.
한화는 조기 인사로 분위기 쇄신을 꾀했다. 한화는 9월 사장단 인사를 단행한 데 이어 11월 임원인사까지 마무리하며 일찌감치 내년을 위한 채비를 맞췄다.
GS그룹은 인사폭을 총 30명으로 최소화하되 부사장 2명과 전무 1명을 외부에서 영입하며 쇄신을 꾀했다. 외부인력 수혈이 거의 없던 GS가 주요 보직에 외부 인물을 3명이나 영입한 것은 불확실성 돌파를 위한 변화를 모색하려는 파격 인사라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이 외에 현대중공업그룹은 현 경영진을 모두 유임시키며 업무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여풍당당’ 더 세졌다
여성인재 중용 기조도 더욱 강화됐다. 삼성전자는 올해 총 8명의 신규 여성 임원을 배출했으며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첫 여성 전무 승진자가 나왔다. 유미영 생활가전사업부 SW개발그룹장이 그 주인공이다. 또한 이윤경(41) 삼성리서치 데이터분석연구실 상무는 올해 최연소 신임 임원이라는 기록을 썼다.현대차도 브랜드커뮤니케이션1팀장 김주미 책임매니저를 비롯한 5명의 여성 신임 임원을 발탁했고 SK는 올해 7명의 여성 임원을 냈다. SK의 경우 1982년생인 최소정 SK텔레콤 구독미디어담당 겸 드림어스컴퍼니 전략그룹장이 최연소 임원 승진이라는 기록을 썼다.
LG도 올해 전무 승진 4명과 신규 임원 선임 11명 등 역대 최다인 15명의 여성 임원이 나왔다. 특히 ▲김희연 LG디스플레이 경영전략 그룹장 ▲여명희 LG유플러스 CFO 경영기획담당 ▲김새라 LG유플러스 컨슈머사업부문 마케팅그룹장 ▲윤수희 LG화학 생명과학사업본부 사업부장 등 기술·생산 등 분야에서 여성 임원이 배출돼 눈길을 끌었다. 지혜경 LG생활건강 상무의 경우 1983년생으로 최연소 임원의 타이틀을 획득했다.
한화그룹의 경우 유리천장을 깨뜨린 첫 여성 CEO가 나왔다. 김은희 한화역사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김 대표는 1978년생으로 올해 42세다. 사업 혁신 및 신규사업 추진 등 기획 전문가로 능력을 인정받아 이번 인사에서 한화그룹의 첫 여성 CEO로 발탁됐다는 설명이다.
재계 관계자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여성 임원 발탁도 매년 확대되는 추세”라며 “특히 각 기업이 성별이나 연공서열에 상관없이 오로지 실력으로만 평가하는 원칙을 강화함에 따라 주요 보직에 여성의 비율은 더욱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