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의회가 원자력 발전을 '그린 택소노미'에 포함하기로 결정하면서 한국 정부도 K-택소노미에 원자력 발전을 포함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EU가 내세운 기준이 까다로워 국내에서는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9일 업계에 따르면 EU 의회는 최근 EU 집행위원회가 지난 2월 제안한 '원자력 발전 및 천연가스의 택소노미 포함안'을 가결했다. 투표에 참여한 639명 중 찬성이 328명, 반대 278명, 기권 33명인 것으로 전해진다. 오는 11일까지 EU 이사회 27개국 중 20개국 이상이 반대하지 않으면 원자력 발전과 천연가스는 내년 1월부터 그린 택소노미에 최종 포함된다.
그린 택소노미는 특정 기술이나 산업에 사용된 에너지원이 친환경적인지 따지고 투자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자금 조달이나 투자 등을 유도할 수 있어 관련 산업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기업과 투자자들은 택소노미를 일종의 '녹색금융지침서'로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U가 원자력 발전을 친환경 에너지로 인정하면서 윤석열 정부의 K-택소노미 수정 작업에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앞서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12월 원전을 제외하고 액화천연가스(LNG)를 친환경으로 분류한 K-택소노미를 발표한 바 있다. 당시 환경부는 국제동향을 지속적으로 살피고 국내상황을 감안해 원전을 K-택소노미 명단에 넣을지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는 이전부터 원자력 발전을 K-택소노미에 포함시킬 것이라고 말해왔다. 지난 5월3일 발표된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를 보면 "EU 사례를 참고해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하겠다"며 "내년부터는 현장에 본격 적용해 녹색 투자 분야 자금을 유치하겠다"고 적혔다. 환경부는 현재 K-택소노미 초안을 마련하기 위해 전문가와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고 이르면 이달 말이나 다음달 초쯤 K-택소노미 초안을 공개할 예정이다.
K-택소노미, EU 조건 수용 가능성 낮아
윤석열 정부는 EU 결정에 힘입어 원자력 발전을 K-택소노미에 포함할 예정이지만 EU가 내건 조건을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은 낮다.
EU는 원자력 발전을 친환경으로 보기 위한 핵심 조건으로 2025년부터 사고 저항성 핵연료(ATF)를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ATF 기술은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상태로 업계 선두주자인 미국도 2025년 상용화를 목표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한국이 2025년부터 ATF을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한국원자력원료는 2031년 ATF 상용도입을 목표로 내세운 바 있다.
또 다른 핵심 조건인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 확보도 문제다. EU는 오는 2050년까지 관련 시설을 확보하기 위한 세부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규정했으나 현재 한국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부지도 정하지 못한 상태다. 정부는 특별법을 마련하고 국무총리 산하 전담조직을 신설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방안을 실행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주민들의 반대를 뚫고 부지 확보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앞선 정부들은 인천 굴업도(1994년), 전북 부안(2004년) 등에 방사성폐기물 처리시설을 설치하려 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끝내 무산됐다.
윤석열 정부가 원자력 발전을 K-택소노미에 포함시키기 위해 EU보다 완화된 기준을 적용할 경우 무리하게 정책을 강행한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김지석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전문위원은 "2021년 한국의 원자력 발전 비중(27.4%)은 전 세계 원자력 발전 비중(9.9%)의 세 배 수준"이라며 "이미 높은 비중을 더 높이려 한다면 EU가 제시한 ATF 사용과 고준위 핵폐기물 저장시설 확보 등 안전기준을 먼저 강화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EU의 이번 결정으로 원자력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처럼 해석해서는 안 된다"며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안보 강화를 위해 재생에너지 확대에 힘을 써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