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북미 반도체 생산거점 구축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미국이 추가 투자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양사의 메모리 반도체 핵심 공정을 자국으로 끌어와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메모리 공급난이 심화하고 중국 기업들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는 만큼 두 회사를 향한 요구는 거세질 전망이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1기 팹(Fab)의 연내 가동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6월 주재원을 대규모로 보낸 데 이어 최근에는 반도체(DS) 부문 핵심 인력을 파견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열린 2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는 올해 말 테일러 2기 팹 착공을 시작해 2030년 양산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SK하이닉스도 북미 생산거점 구축에 나선다. SK하이닉스는 오는 27일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서 첨단 패키징 팹 착공식을 열 예정이다.
양사 공장은 미국이 요구하는 메모리 반도체 전공정 팹은 아니다. 삼성전자 테일러 팹은 고객사가 설계한 첨단 로직 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 공장이다. 기존에 있던 오스틴 팹 역시 파운드리다. SK하이닉스 인디애나 팹은 한국에서 전공정을 마친 D램 웨이퍼를 들여와 적층·패키징해 완제품을 생산하는 후공정 시설이다. 두 회사 모두 웨이퍼에 D램·낸드의 집적회로를 새기는 전공정 팹은 미국에 없다.
미국이 두 회사에 전공정 투자를 요구하는 배경에는 메모리 반도체 공급망을 완성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미국은 엔비디아 등 반도체 설계기업을 보유한 데 이어 TSMC·삼성전자의 파운드리와 SK하이닉스 등의 첨단 패키징 시설을 자국에 유치했다. 그러나 메모리 반도체의 핵심 기반이 되는 전공정은 마이크론에 의존하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생산능력까지 자국으로 끌어들여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메모리 공급난이 심화하며 중국 기업이 자국 내 공급망에 진입할 가능성이 커진 것도 주요인으로 꼽힌다. 최근 애플은 메모리 조달 부담을 낮추기 위해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D램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미국 정치권은 중국 기업에 대한 반도체 수출 통제 기조가 흔들릴 수 있다며 구매 제한을 요구하고 있다. 메모리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세가 장기화할 경우 중국 기업들을 계속 공급망 밖에 두기는 어렵다.
미국의 한국 기업들에 대한 압박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지난달 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공장 착공식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생산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며 "마이크론이 앞장서면 경쟁사들도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러트닉 장관이 공개적으로 두 회사를 지목해 생산시설 투자를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미국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전략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지난 5월 트럼프 대통령은 퇴임할 무렵 미국이 전 세계 반도체 제조능력의 50% 이상을 확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삼성전자는 현재까지 미국 내 전공정 팹 투자와 거리를 두는 모습이다. 회사가 공개한 추가 증설 구상은 파운드리에 한정돼 있다. 테일러 팹2기에 이어 1.4나노 고객 문의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능력 확충을 검토하고 있지만 메모리 전공정 팹 신설에 관해서는 별도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SK하이닉스는 가능성을 열어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달 미국주식예탁증서(ADR) 상장 직후 CNBC 인터뷰에서 전력과 용수, 부지, 인력, 공급망 등 여건이 갖춰지면 미국에 메모리 생산공장을 건설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최 회장의 인디애나 팹 착공식 참석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업계에서는 전공정 팹 투자와 관련한 구체적인 구상이 나올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AI발 메모리 공급난이 장기화할수록 안정적인 물량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현지 생산 요구도 거세질 것"이라며 "양사는 국내에서도 대규모 증설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셈법은 복잡해질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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