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사이 범현대가는 많이 바뀌었다. 정 명예회장이 이끌던 옛 현대그룹은 계열 분리 이후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백화점그룹, 현대해상,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현대건설 등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올해 범현대가는 분리 이후 가장 옛 모습과 비슷해졌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채권단이 관리했던 현대종합상사는 현대중공업이 다시 인수했고 현대오일뱅크도 범현대가 쪽으로 주인이 바뀌는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각 그룹별 약진도 돋보인다. 새로운 현대를 꿈꾸는 범현대가 사람들의 행보를 들여다봤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제사 뒤 다시 외국행, 제철소 준공 눈앞
글로벌 경영의 일환으로 해외 현지공장 점검 등으로 바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은 이날 함께 제사에 참석했다. 정몽구 회장은 정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이지만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장자 역할을 맡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기자들에게 “올해 국내시장은 힘들지만 세계시장은 판매량이 늘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현대ㆍ기아차는 요사이 리콜 사태 등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토요타의 후진으로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또 자체적인 사업계획을 차곡차곡 이행해 나가고 있다.
제사를 마친 뒤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정몽구 회장은 전용기편으로 러시아와 체코를 차례로 방문하기 위해 출국했다. 2월 미국 조지아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이후 한 달여 만에 또다시 출장길에 오른 것이다.
정 회장은 러시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공장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체코 노소비체공장, 슬로바키아 질리나공장 등을 방문한 뒤 귀국하는 일정을 잡았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이기 때문에 새벽 일찍 일어난다”는 말을 되뇌이곤 했다. 정몽구 회장도 달마다 다른 대륙,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새벽을 맞고 있다. 자신이 진두지휘한 글로벌 전략대로 해외공장 가동과 준공 여부를 챙기는 정몽구 회장의 행보는 열사의 사막과 베트남의 밀림 등 유달리 현장에 강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어우러진다.
정몽구 회장은 4월8일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준공행사를 앞두고 있다. 1970년대 말 박정희 정부 이래 가져왔던 현대가의 30년 숙원을 이루는 순간이다.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
현대종합상사 인수ㆍ오일뱅크 인수 목전
6남인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현대중공업 대주주)는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회 참석차 3월17일 스위스 취리히로 출국해 21일 제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은 전사적인 추모행사를 치렀다. 현대중공업 5500여명의 임직원은 19일 오전 울산 전하동 본사 체육관에서 사내 추모행사를 열었고 정 명예회장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추모음악회를 갖기도 했다.
추모행사 외에 기업 활동으로도 현대중공업의 최근 행보는 가장 왕성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해 말 현대종합상사 인수를 마무리한 바 있고, 현대오일뱅크 인수에도 가장 근접해 있다.
재인수한 현대종합상사에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조카인 정몽혁 씨가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정몽혁 회장은 정 명예회장이 가장 아꼈던 다섯째 동생 고 정신영 씨의 아들이다. 정몽구 회장, 정몽준 의원과는 사촌 간이다.
현대중공업은 이밖에 지난 3월12일 주주총회에서 '해상운송업'을 사업목적에 추가한 정관 변경안을 승인했다. 이로써 국내외 해상운송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회사 쪽은 조선 시황이 악화되면서 해운업체들이 주문한 뒤 인수하지 않는 선박 등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 정도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해운업에 본격 진출하면 현대차그룹의 글로비스, 현대그룹의 현대상선과 함께 물류부문의 경쟁 구도가 형성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전에 현대상선, 현대건설 등을 두고 현대중공업과 현대그룹이 파열음을 냈던 것과 연결 짓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증권업에서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 현대차그룹은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각각 현대증권, 하이투자증권, HMC투자증권을 계열사로 두고 경쟁 중이다.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아버지 곁에서 야구단과 인연 다시 맺어
7남인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은 조용히 제사에 참석한 것으로 전해진다. 3월19일 회사 임원들의 창우리 선영 참배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정몽윤 회장은 매일 아버지의 모습을 대하고 있다. 현대그룹의 초창기 사옥이었던 현대해상의 광화문 본사 사옥 1층에 정주영 명예회장의 흉상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주영 회장의 흉상은 현대해상 외에 서울아산병원, 울산대학교, 현대 계동사옥, 서산농장 등 다섯군데에 있다. 하지만 현대해상처럼 정주영 회장의 아들들이 매일 마주대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곳은 없다.
현재 계동사옥에는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현대종합상사 등이 입주해있지만 그룹(개별 회사) 회장들이 매일 들르지는 않는다.
현대해상은 또 과거 범현대가의 심벌이었던 프로야구단과의 특별한 인연도 다시 이어가기로 했다. 현대 유니콘스의 후신인 넥센 히어로즈는 올해 선수단이 착용하는 헬멧에 현대해상의 브랜드인 'Hicar' 광고를 달고 경기에 뛰게 된다.
현대차그룹의 야구단으로 기아 타이거즈가 있긴 하지만 현대가 사람들에게 옛 유니콘스의 의미는 각별하다.
야구단 창단에 20여년간 공을 들여왔던 생전의 정주영 회장은 돈을 아끼지 않는 투자로 단기간에 유니콘스를 명문구단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의 사망과 형제간의 분란, 현대그룹의 표류 등으로 야구단이 어려움을 겪을 때 정몽윤 회장은 각별한 관심으로 구단 지원과 운영을 도맡기도 했다. 그런 정몽윤 회장에게 히어로즈는 출가시킨 자식 같은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이밖에 범현대가 사람들 중에서 현대백화점그룹 우경숙 고문(3남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의 부인)은 사실상의 맏며느리 자격으로 제사를 준비했다. 십수년째 제사 준비를 도맡았던 이정화 여사(정몽구 회장의 부인)가 지난해 별세했기 때문이다. 현대상선 지분 경쟁 등의 문제로 아주버님 또는 시동생들과 불편한 관계로 비치기도 했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고 정몽헌 회장(정주영 명예회장 5남)의 부인)은 그룹 내에서 추도 행사를 가지는 한편 조용히 제사에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