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은 여주의 영릉에 잠들어 계신다. 이곳은 조선의 운명을 100년이나 연장시켜 줬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영릉에서 언덕을 하나 넘으면 북벌정책을 추진했던 효종도 만나 뵐 수 있다. 그리고 두 왕릉에서 멀지 않은 능현리엔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한 비운의 명성황후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가 있다. 신록이 점점 짙어지는 계절, 역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경기도 여주 영릉(英陵)은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재위 1418~1450년)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21세에 즉위한 세종이 53세로 승하할 때까지 32년간 재위하면서 이루어놓은 업적은 찬란하다.

정치적으론 젊은 학자들을 등용해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했으며, 조선의 자주와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측우기ㆍ해시계ㆍ물시계 등 실생활에 도움 되는 과학기구도 제작하게 했다. 군사적으로는 북쪽으로는 6진을 개척해 국토를 넓혔고, 남쪽으로는 대마도를 정벌하는 등 세종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군사 등 모든 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

볼거리, 이야깃거리 많은 세종대왕 묘소

영릉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의 무게에 어울리게 교육적인 볼거리가 많다. 왕릉 입구엔 세종의 치적을 살필 수 있는 유물전시관인 세종전이 있고, 그 앞 잔디밭엔 측우기돚해시계돚혼천의 등 세종의 노력으로 탄생했던 과학기구들을 재현해 놓아 아이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그래서 항상 답사 나온 어린이들로 북적거린다.

영릉에서 어찌 풍수얘기를 빼놓을 수 있을까. 세종의 무덤은 처음엔 경기도 광주 대모산(大母山,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에 있었다. 원래 이곳은 터가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종은 세상을 떠날 때 "죽어서도 혼백이나마 부모님께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올리겠다"며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신하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 원래 세종에겐 자식들이 많았다. 소헌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8대군 2공주를 비롯해 후궁과 궁인들에게서 10군 2옹주를 뒀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래 없는 왕실의 번창이었다. 그렇지만 세종의 왕위를 이어받은 문종이 2년 만에 세상을 뜨고, 그 아들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로 유배됐다가 목숨을 잃었다. 결국 이 사건 전후로 세종의 22명이나 되는 자식들 가운데 단 1명, 수양대군(세조)만 남고 모조리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처럼 변고가 잇따르자 조정의 일부 대신들은 헌인릉과 함께 있는 영릉의 터가 부실한 탓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조 때는 여러 반대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1469년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세종대왕이 새로 자리 잡은 여주 땅은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가 이미 들어와 있었는데, 왕릉지로 선택되면서 이를 옮기게 하고 세종이 들어온 일은 두고두고 민간에 화젯거리가 됐다.

이번엔 누가 봐도 명당이었던 모양이다. 풍수가들은 영릉의 형국을 산세가 봉황이 알을 품듯 영릉을 감싸고 있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산봉우리들이 반쯤 핀 모란 꽃송이처럼 영릉을 둘러싸고 있다는 모란반개형(牡丹半開形), 용이 돌아서 영릉을 쳐다본다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라고 칭송했다.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영릉을 '왕릉 중에서 제일'이라 평했다. 후세의 풍수가들 역시 조선왕조가 100년 더 연장됐을 정도로 명당이라며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고 칭송했다.

북벌 정책 추진했던 효종대왕 잠든 녕릉

영릉과 이웃한 녕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재위 1649∼1659년)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인조의 둘째아들인 효종은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와 강화를 맺으면서 이듬해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된다.

그리고 9년 뒤인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는데, 청나라 문물에 호의적이었던 소현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다가 귀국한 지 두달만에 갑자기 병을 얻어 사망하자 곧바로 세자에 책봉됐다. 이러한 전후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 역시 죽음을 당했고, 소현세자의 세아들도 제주도에 유배됐다가 죽었다.

이 이야기는 얼마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추노>의 한 축으로서 극을 이끌어가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정치적 배경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은 김상헌ㆍ송시열 등을 중용해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했으나 청나라의 힘이 갈수록 커지는 바람에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릉과 녕릉 사이엔 700m 정도의 오솔길이 나있다. 한번에 두분의 왕을 만날 수 있는 10분 거리의 좋은 산책길이지만 아쉽게도 산불조심기간(11월1일~5월31일)엔 이 길을 통행할 수 없다. 이 기간에 녕릉으로 가려면 영릉 주차장에서 아스팔트 포장된 고갯길을 1km 정도 넘어가야 한다. 녕릉 입구에도 따로 주차장이 있다. 둘러보는 데 세종 영릉은 30분에서 1시간, 효종 녕릉은 30분 정도 걸린다. 따라서 영릉과 녕릉을 모두 둘러보려면 넉넉히 2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문화유산해설을 들으려면 예약(031-887-2868)해야 한다. 입장시간은 09:00~18:30(매표 18:00), 요금은 대인(19~64세) 500원, 소인(7~18세) 300원. 한장의 표로 영릉과 녕릉 두군데 모두 입장이 가능하다. 매주 둘째, 넷째주 토요일 청소년 무료 입장. 주차비는 무료. 매주 월요일은 정기휴일.

명성황후 민씨가 태어나 어린 시절 보낸 생가

영릉을 빠져나와 37번 국도를 타면 5~10분만에 비운의 왕비 명성황후 생가에 닿는다. 고종황제의 부인인 명성황후 민씨(1851~1895년)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고택이다. 1687년 세운 집인데, 10여년 전까지 실제로 사람이 거주했던 만큼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조선 중기 중부지방의 살림집 양식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입구에 위치한 감고당(感古堂)은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돼 입궐할 때까지 살았던 집. 원래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에 있다가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진 뒤 철거 위기에 놓이자 2006년 명성황후 생가가 있는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명성황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일제에 의해 왜곡됐던 탓에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지만, 고종의 황후로서 개화기에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다 1895년 10월8일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시해당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 인물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명성황후기념관은 이러한 명성황후의 일생에 대해 꼼꼼히 살펴볼 수 있는 공간.

최근 생가 바로 옆에 초가집 5동으로 조성한 민속마을(능골주막)은 명성황후 생가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널찍한 마당에선 널뛰기, 투호놀이, 고리던지기, 윷놀이, 자치기, 굴렁쇠굴리기 등 전통놀이를 즐길 수 있다. 일행과 주전부리나 식사 등을 하면서 전통놀이를 즐기다 보면 1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여행정보

●교통 서울→6번 국도→양평→37번 국도→영릉→명성황후생가 / 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37번 국도→명성황후 생가→영릉 <서울에서 1시간~1시간 30분 소요>

●숙식 영릉ㆍ녕릉 바로 앞엔 숙식할 곳이 마땅치 않다. 왕릉이 있는 능서면 왕대리에 산장여관(031-884-5075)을 비롯해 번도리에 갤럭시모텔(031-881-4206), 신지리에 스톤모텔(031-884-7152) 등이 있다. 명성황후 생가와 여주읍 점봉리에 톨게이트파크(031-884-2525), 부성장여관(031-883-7182) 등의 모텔급 여관이 있다.

명성황후 생가에 조성된 민속마을(능골주막 031-885-4616)에선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다. 잔치국수 3000원, 떡만두국 5000원, 도토리묵무침 4000원, 김치전 5000원, 파전 1만원. 이외에도 파전ㆍ두부김치ㆍ묵무침 등이 한 상에 올라오는 모듬상(3~4인) 1만5000원.

●참조 영릉 관리사무소 031-885-3123~4 (sejong.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