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견본주택을 볼 때마다 막판에 떠오르는 생각이다. ‘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건 어쩔 수 없지만 냉정을 되찾는 데는 몇 초가 걸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견본주택이기 때문이다.
굴러다니는 빨랫감하며, 자기 자리조차 불명확한 청소기나 다리미는 견본주택에서는 볼 수 없다. 깔끔한 책장과 우아한 액자,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고급 서재만 자리할 뿐이다. 그러니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란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잘 팔기 위해 좀 더 예쁘게 포장하는 것을 두고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빌트인’이라는 이름으로 견본주택의 화려함을 얹어 팔기도 하니 계약자는 계산기만 잘 두드리면 될 일이다.
현실과 다른 주거공간에 식상할 즈음 주거환경의 공간 개념을 바꾼 아파트가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주부들이 제기한 아파트의 개선사항을 적극 반영해 만든 아파트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 아직 적용 아파트는 없지만 상용화 단계에 이르렀다는 말에 설레는 마음으로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코오롱건설 하늘채 주택문화관을 찾았다.
효율성이 만들어낸 마법
“조금 있으면 놀라운 마법이 벌어집니다.”
독특한 프로젝트 ‘칸칸’의 개발을 주도한 서현주 상품개발팀장의 말이다. 생뚱맞게 마법이라니? 잠시 후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야 서 팀장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됐다.
화장실과 주방을 둘러 가는 통로가 어느새 수납공간으로 막힌 독립된 공간으로 변신한다. 조금 전까지 통로였던 곳이 벽장이 돼버렸다. 길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는 거실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다. 병풍처럼 자리했던 회전식 가변형 벽체가 ‘ㄱ’자 모양으로 미끄러져 나오면 거실은 독립공간으로 바뀐다. 영화관람을 하거나 게스트룸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이 서 팀장의 설명이다.
게스트와 집주인의 출입구가 다르다는 것도 엉뚱하다. 게스트는 보이는 길을 따라 가면 된다. 반면 집주인은 비밀의 문이 있다. 마치 ‘열려라 참깨’를 외치기라도 한 것처럼 수납장 사이로 길이 생긴다.
수납공간에서 한쪽은 자녀방과, 다른 한쪽은 주방의 다용도실과 연결된다. 밖에서 놀다가 들어온 자녀가 운동용품이나 신발 등을 정리하고 곧장 화장실과 자녀방으로 갈 수 있도록 했다. 마트에서 장을 본 주부라면 거실을 통과하지 않고 주방 다용도실에서 음식 정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연결된다.
마치 미로같다. 이 통로가 어디로 연결될지 알 수가 없다. 한 참을 헤매다보니 다시 출입구다. 집안에서 술래잡기를 한다면 술래가 꽤나 고생하겠다 싶은 생각마저 든다.
엉뚱하고 특별한 설계는 단면을 보면 보다 이해하기 쉽다. 각각의 영역이 폐곡선으로 이뤄졌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막혀있는 법이 없다. 심지어 침실의 문도 침대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만들어졌다. 설계의 핵심은 효율적인 이동거리다.
집안의 물건들은 어디에 숨었을까
자유자재로 동선을 설계할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수납의 경제성은 칸칸의 대표적이 매력이다. 드레스 룸은 계절별 혹은 개인별로 수납할 수 있도록 2중 미닫이로 설계했다. 거실에서 갈 곳을 잃던 청소기나 다리미도 거실 벽면 뒤의 수납공간에 모두 숨었다.
허투루 사용한 공간이 없다. 출입구 하단의 수납장은 높은 수납공간을 이용하기 위해 딛고 올라 설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손가락 하나 길이의 폭은 배달 음식점 유인물을 놓는 공간으로 활용할 정도다. 주방에는 냄비의 뚜껑을 걸어놓는 공간까지 만들었다.
칸칸의 중요한 원칙은 각각의 물건들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하도록 설계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안방 드레스 룸의 화장대 수납공간은 욕실 세면기 수납공간으로 활용된다. 이곳은 화장품이나 헤어 드라이기 등이 차지하는 공간이다. 양쪽에서 모두 열 수 있도록 했고 물건은 회전형 선반을 통해 꺼내기 쉽도록 설계됐다.
욕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욕실 바로 앞에 위치한 빨래수거함은 반대쪽 세탁실과 연결된다. 세탁된 빨랫감은 세탁기에서 한 발자국도 걷지 않고 건조기를 세탁기 상단에 설치했다. 건조된 내의는 빨래수거함 위의 내의 보관함에 정리하게 되는데, 반대쪽에서 보면 욕실 입구와 연결된다. 최소한의 동선으로 집안일을 해낼 수 있는 설계다.
욕실에는 쿠션이 있는 의자에 앉아 족욕이 가능하다. 노부모가 이용하거나 어린 자녀를 씻길 때도 편리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높이나 간격을 조절할 수 있는 선반의 디자인은 마치 노점상의 진열대를 연상케 한다. 가변형 옷장이나 벽면도 힘없는 가정주부가 조절하기에는 벅차 보인다. 게다가 바닥재에 스크래치 가능성도 있다.
서 팀장은 “현재 견본주택에 전시 중인 제품은 완제품이 아닌 개발단계의 제품이기 때문에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서 “11월 분양 예정인 평택 장안 코오롱 하늘채에서 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내놓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미완성인 칸칸의 변화에 기대가 모아진다.
상품개발자 곤도 노리코는?
칸칸을 현장에서 직접 보면 크게 두 가지에서 놀란다. 하나는 숨바꼭질 하듯 숨어있는 수납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주택과 다른 가변성에 있다. 그래서인지 현장을 찾은 주부들은 맞장구를 치며 실용성에 찬사를 쏟아내는 반면, 남성들은 생각보다 좁아 보이는 구조에 의문을 갖는다.
어찌됐건 현장에서 느끼는 칸칸이 적용된 견본주택은 무척 ‘일본스럽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 칸칸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물은 일본에서 수납의 여왕으로 유명한 곤도노리코씨다. 그녀는 아사히신문이 선정한 일본의 저명인사 100인에 선정됐을 뿐 아니라, 가장 영향력 있는 활동가 베스트 3에 뽑히기도 했다.
주부로서 가진 노하우와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을 살려 수납대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곤도노리코로 인해 '어메니티 어드바이저(Amenity Advisor)'라는 직업이 새로 생겨났을 정도다. 현재 곤도노리코 홈앤라이프 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으며, 아카데미 라이프 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일본 최대 주택건설회사인 다이와하우스와 함께 수납공간을 개발했으며, 일본가구업체인 이낙스의 가구개발 및 컨설팅도 진행했다. 현재 32권의 수납 관련 노하우를 담아낸 책을 발행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