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난 역사학자도 아니고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 본 적조차 없다. 지금껏 글을 써서 돈을 벌어 본 적도 없다. 30년간의 직장생활이 그의 경력이다. 그런 그가 대기업 임원으로 은퇴한지 3년 만에 책을 내고 작가로 데뷔했다.
SK에너지, SK가스를 거쳐 2007년 충청에너지 전무로 은퇴한 뒤 <장안 그리고 시안>이라는 역사 여행 수필집을 낸 이기성(56) 씨의 이야기다.
◆즐겨라, 그 속에 답이 있다
이씨의 첫번째 책인 <장안 그리고 시안>은 은퇴 후 1년간 중국에서 살면서 만난 사람들과 여행을 하며 겪었던 일을 풀어낸 책이다. 중간중간 그의 소박한 여행담과 함께 역사 이야기가 녹아 있어 읽는 맛을 더한다. 아마추어 역사학자이지만 그의 역사 관련 지식은 남다르다.
대기업 임원과 작가. 언뜻 두 직업의 연관관계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더욱이 대기업 임원 출신 은퇴자들이 대부분 경영 관련 서적을 쓰는 것과는 달리 역사 서적이라니. 도대체 어떤 경로를 거쳐 30년간 기업에 몸 담았던 그가 역사 서적의 작가로 데뷔할 수 있었던 걸까. 자못 궁금증이 앞선다.
"원래 역사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무작정 갔죠, 그곳으로. 허허"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이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답을 던진다. "궁금했고 좋아하는 일이었으니 그저 그 일을 찾아갔을 뿐"이라는 것.
그는 "우리 나이쯤 되면 노후를 뭐하고 보내야 할지 고민 안 하는 사람이 있냐"고 운을 뗐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늘 고민하면서도 원칙이 있었어요. 앞으로 남은 인생은 '목표'를 이루기 보다는 '과정'을 즐기면서 살자는 것이었죠. 어렸을 때도 저는 역사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 뜻에 따라 경영을 전공하고 대기업에 취직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최우선에 두기로 한 거죠."
그런데 왜 하필 중국이었을까. 이씨는 "그래도 30년간의 직장 생활이 내 꿈을 찾는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2005년 무렵, 이씨가 SK에너지에 근무하던 당시 회사는 마침 중국 진출을 시작했다. 덕분에 직원들에게 중국어 학습을 지원해 주는 제도가 마련됐는데 그때 배운 중국어가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에는 제가 은퇴하고 중국에 갈 줄 알았나요. 배워놓으면 어디든 써먹을 데가 있겠지 싶어서 일단 열심히 배웠는데 그리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은퇴를 앞두고 역사 공부가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곰곰 따져보니 중국의 시안 지역이 눈에 들어오는 거에요. 예전엔 그야말로 온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옛 도읍 `장안돴이 지금은 조용하기만 한 변방으로 변한 이유가 뭘까. 궁금하니까 자료를 모으고 공부를 하다가 직접 가서 부딪치는 게 최고다 싶어 일단 현장으로 간 거죠."
물론 현실적인 고려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곳 물가가 국내의 반값도 되지 않았던 것. 당시 40~50평대의 1년치 아파트 비용이 5만위엔 정도. 우리나라 돈으로 600만원 정도인 셈이다. 이씨는 "어차피 한국에 있을 거면 그곳에 가서 더 적은 돈으로, 더 풍요롭게 1년을 보낼 수 있는데 못 갈 이유가 없지 않냐"고 호탕하게 웃었다.
은퇴 후 6개월 만에 무작정 떠난 중국. 어학원에서 아들뻘 되는 아이들과 중국어 수업을 들으며 주말에는 혼자 배낭을 둘러메고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 그곳에서 보고 들은 역사의 현장과 느낌을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았다.
"제 호기심을 채우느라 여행을 다니다 보니 지금까지 몰랐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혼자서 기차 여행을 하다 보면 중국의 고급 공무원과 만나서 하루 종일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처음에는 작가를 목표로 두지 않았어요. 그저 여행한 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더 공부하고 자료를 모으다 보니 책이라는 결과물이 나오게 된 거지요."
◆낯섦을 극복하지 않으면 설렘도 없다
이씨는 현재 스페인과 관련한 서적도 준비 중이다. 올해 지인과 함께 한 한달 동안의 스페인 여행을 정리하고 있다. 그는 또 강대국 사이에서 부대낀 동유럽의 역사와 국내 역사가 비슷한 구석이 많다는 생각에 동유럽에서도 1년쯤 살아본 후 책을 내고 싶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작가로서 돱적어도 책 5권을 쓰겠다돲는 야심찬 계획을 품고 있다.
"사실 첫걸음 떼는 게 어렵지 두번째부터는 수월해지는 것 같아요. 책이라곤 써 본 적도 없는 제가 책 한 권을 내기까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분량은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지, 내가 쓰고 있는 글이 과연 책으로서 가치가 있는 건지 매사 의심하고 두려웠어요. 그런데 이제는 한번 겪어봐서 인지 절차상의 문제들은 수월하거든요."
그는 무명의 작가를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어 까다로운 심사를 거친 후 자신의 돈으로 직접 이 책을 출간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의 삶을 즐긴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니 흐뭇하기만 하다고. 특히 무명작자가 낸 책치고는 반응이 좋다며 뿌듯해 했다.
"젊은 사람들도 낯선 곳에서 살려고 하면 두려울 것입니다. 익숙지 않다는 건 곧 불편함이니까요. 그래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뛰어들면 새로운 설렘이 느껴집니다. 지금 우리 나이에 무엇을 이루려고 욕심을 부리겠습니까. 바꿔 말하면 어느 때보다 순수하게 내 일을, 내 삶을 즐길 수 있는 때가 아닙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은퇴 후 중국행은 '은퇴 후 우울증'을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컸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회사 동료나 친구들을 봐도 은퇴하면 누구나 공허함이나 우울증을 느낀다는 것. 하루아침에 할 일이 없어지니 당연한 일이다.
"조직에서만 30년을 살았으니 세상물정에는 까막눈이고, 무작정 돈벌이에 뛰어들기에도 위험부담이 큰 게 사실이잖아요. 그 시기에 저는 중국에서 전혀 다른 환경에 있었으니까 공허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고 할까요. 우리 같은 시기에 '무언가 열중할 것'이 있다는 건 그래서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가 꽤 진지해진다. 아마도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들, 나아가 그맘때 모두의 고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은퇴하면 자꾸만 집으로 숨는 사람들이 많아요. 스스로가 쓸모 없어 보이니 사람을 피하게 되는 거죠. 그래도 자꾸 사람들과 만나고 부딪치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돼요. 삶을 즐기고 싶다면 세상 밖으로 나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