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부호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유태인이다. 유태인의 지적자산이 총망라 농축되어 있는 책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경우는 고민이나 불화, 아니면 지갑이 텅 비어있을 때다. 특히 지갑이 비어있을 때 가장 큰 상처를 입는다.' 예나 지금이나 돈 없으면 세상 살기 참 어렵다.

경제활동을 하는 사회적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빠짐없이 사용하는 '돈'. 심지어 요즘은 돈 밝히는 견공도 있다. 주인이나 이웃에게 받은 돈으로 가게에 가서 '소시지'를 사먹는 모습을 보면 정말 기가 막힌다. 이 견공은 돈을 받으려고 주인이나 이웃들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치며 애교까지 부린다.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돈'은 가치교환수단으로서 주로 경제영역으로만 생각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돈이 단순히 경제적 가치만을 지닌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 돈을 사용하지만 정작 돈에 대해 잘 모른다. 돈에는 한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깃들어 있다. 관심을 가지고 돈을 살펴보면 각국의 문화유산을 비롯하여 상징물, 주요 인물 등이 보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5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이 모델로 등장했다. 여성들의 역할이 더욱 커진 현재, 세계의 수많은 화폐 중에서 지폐의 절반을 장식하고 있는 여성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가장 많은 등장, 엘리자베스 2세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재위 1952∼  )는 윈저왕가 조지 6세의 장녀로 왕가들이 붕괴된 20세기 이후 두나라 이상의 독립국가를 다스리는 유일한 군주다. 기품이 있으면서도 친숙한 여왕으로 영국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화폐 속 주인공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 여성으로 영국 외에도 캐나다, 뉴질랜드 등 20여개 영연방국가 화폐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모습부터 오늘날 할머니가 된 모습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원조 철의 여인, 골다 메이어

얼마 전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세상을 바꾼 25인 중 한명인 골다 메이어(1969~1974, 이스라엘). 이스라엘 건국의 어머니라 불리는 골다 메이어는 이스라엘 첫번째 여성총리이자 세계 3번째 여성총리다. 떠돌이 유대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그들만의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솔직히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성공할지 실패할지 따져 본 적은 없다. 옳다고 여기는 것을 실천할 뿐이다"라고 말한 그녀는 인생에서 정직과 희생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
 


서정시인, 후아나 데 아스바헤

시인이자 학자이며 수녀인 후아나 데 아스바헤(1651~1695, 멕시코)는 멕시코 식민지시대의 탁월한 서정시인이었다. 3살 때 글을 읽을 줄 알았던 신동이었던 그녀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대단해서 남장을 하고서라도 대학에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당시 멕시코에서 여성의 지식추구는 억제 당했으며, 아무리 똑똑해도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결국 수녀가 되었다.


그녀는 이후 '여자를 비난하는 어리석은 남자들 Hombres necios que acusse'이란 시로 명성을 얻게 되었고 후에 그녀는 세상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신의 피로 고백서를 썼으며 서적, 과학기고, 악기들을 판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오직 종교적 의무에만 헌신했다.

스웨덴의 나이팅게일, 제니 린드

유럽의 지폐에는 유난히 예술가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제니 린드(1820~1887, 스웨덴)도 그 중 한사람이다. 가수로서 고작 5년 밖에 활동하지 않았지만 당시 유럽은 '제니 린드 열풍'이 일 정도로 뛰어난 소프라노였다. 그녀의 이름을 딴 모자, 손수건 등이 인기를 끌 정도였고 '제니 린드 피아노'까지 등장했을 정도였다.

영국은 영국을 위해 공헌을 한 사람만이 들어설 수 있는 웨스트민스트 사원의 시인코너에 린드의 조형물을 설치해 그녀를 간직했다. 이 사원에 영국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제니 린드와 헬델 두사람 밖에 없다. 작곡가 쇼팽이 그녀의 연인이었고, 동화작가 안데르센도 그녀의 목소리에 반해 동화 '나이팅게일'을 쓸 정도로 그녀를 짝사랑했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카렌 볼릭센

덴마크 화폐에 등장하는 카렌 볼릭센(1885~1962, 덴마크)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원작자다. 그녀는 결혼 후 아프리카 케냐에서 살았으나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다. 덴마크로 돌아온 후 케냐에서 보낸 시절을 바탕으로 쓴 논픽션이 바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다.
 


메이지 문단 천재, 히구치 이치요

일본 5000엔짜리 지폐에 등장하는 히구치 이치요(1872~1896, 일본)는 19세기 말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여류작가 중 한사람으로 도쿄 서민층의 정서와 유곽의 풍경 등을 소재로 다루었다. 그녀의 작품은 여성을 섬세하게 묘사하였는데 파격적인 소재와 문체는 현대소설이라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폐결핵 진단을 받고 24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유곽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사랑과 성장을 그린 <키재기>, 창부들의 삶과 의식을 다룬 <흐린 강> 등이 대표작이다.
 

호주 지폐는 남녀 한명씩 등장

현재는 유로화를 사용하고 있는 국가들의 전 화폐에도 다양한 분야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프랑스에서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마리 퀴리와 그녀의 남편이, 독일에는 유명한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이, 이탈리아에는 아동 교육가 몬테소리가, 아일랜드에는 수녀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캐서린 매콜 리가 등장한다.

이 외에도 칠레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 세계 최초로 여성참정권을 인정한 국가인 뉴질랜드에는 여성운동가 케이트 셰퍼드가, 호주에는 유명 소프라노 넬라 멜바가 등장한다. 재미있는 점은 호주 지폐는 차별 논쟁 때문에 앞뒤로 남녀가 한명씩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성 화폐인물은 대부분 그 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자, 예술가, 노벨상 수상자, 교육자, 사회사업가 등이다. 그녀들의 삶을 통해 나라마다 중시하는 가치관, 그들의 역사, 그들의 자부심을 알 수 있다. 세계여행 등을 통해 각국 화폐를 접하게 된다면 단순히 사용하기만 보다는 한번 찬찬히 살펴보자. 누가 그 나라를 대표하고 있는지 말이다.

서혜림 대학생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