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로 고객이 지점을 방문하지 않아도 계좌 계설이 가능한 HSBC 다이렉트 상품 출시를 공식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다.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다이렉트 상품은 말 그대로 획기적이었다. 365일 24시간 온라인에서 은행업무가 가능하고 하루만 맡겨도 예·적금 이자가 일반 은행에 비해 평균 1~2%포인트 높았으니 말이다.
사이먼 쿠퍼(Simon Cooper) 당시 행장은 기자간담회에서 “HSBC 다이렉트는 단순한 온라인 뱅킹이 아니라 다이렉트 채널을 사용하는 새로운 모델”이라며 “편리하고 이율이 높아 다양한 혜택을 원하는 고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상품”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제는 굳이 은행 창구를 가지 않더라도 실질적인 모든 업무가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획기적인 상품인 만큼 기대도 컸지만 그보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금융실명제법상 필요한 실명확인을 위해서는 고객이 점포방문이 필요한데, HSBC은행은 고객이 점포를 찾는 대신 직원이 고객을 찾아가 실명확인을 한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직원 방문에 대한 부담감과 개인정보 유출 가능성이 문제로 제기됐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직원을 고객들이 과연 쉽게 받아들이고 가입 서명을 할 것인지 여부도 불투명하다고 봤다.
실효성 논란도 적지 않았다. 전국의 모든 고객들을 HSBC은행 직원들이 찾아가려면 인건비 등 비용만 더 크다는 우려다. HSBC은행이 한국시장과 국민들의 정서를 먼저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흘러나왔다.
강만수 회장(오른쪽)이 9월29일 여의도 렉싱턴호텔에서 산은 다이렉트 상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이먼쿠퍼 전 행장과 임원들은 세간의 이 같은 부정적인 시각에 대해서는 연신 “자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2007년 2월 중순까지만 하더라도 HSBC은행 측은 “고객들의 반응이 뜨겁다. 가입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며 다이렉트 상품의 성공을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두달 정도가 지난 4월 초에는 “아직 출범 초기라서 (실적여부는) 알 수 없다. 지켜봐야 한다”로 말을 바꿨다. 이후 1년도 채 안돼 HSBC은행은 소리 소문 없이 HSBC 다이렉트 상품 판매를 중단했다.
HSBC은행은 충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상당한 적자에 허덕였는지, 서둘러 개인금융부를 대폭 축소했다. 그리고 대대적인 구조조정도 강행했다. HSBC은행 노조와 사측의 대립이 1년 가까이 지속됐던 이유다. HSBC은행의 개인금융부서는 지금도 유명무실하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평가다. 개인금융보다는 기업대출만 전문으로 하는 기업금융부에 주력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최근에는 HSBC은행의 한국 철수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HSBC은행은 지난 2007년 2월 다이렉트 상품을 출시했다. 사이먼 쿠퍼(오른쪽)는 다이렉트 상품의 성공을 확신했었다.
◆실패한 상품 들고 나온 강만수 회장
그로부터 4년7개월이 지난 2011년 9월. 산업은행은 '산은 다이렉트 뱅킹'을 출시했다.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이 올 3월 취임한 후 처음으로 선보인 상품이다.
하루만 맡겨도 연 3.5%의 이자를 주는 매력적인 상품이다. 지점을 운영하지 않아서 절약되는 비용으로 예금 금리를 높이고 수수료를 저렴하게 운영되는 방식이다.
예치기간 등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고금리를 보장하는 다른 은행의 수시입출식예금과 달리 예치 기간이나 금액은 물론 거래실적에 대한 제한이 없다. 또 산은의 인터넷뱅킹과 자동화기기(CD·ATM)를 이용하면 수수료를 면제해주고 전월 중 50만원 이상 입금·이체 실적이 있거나 평균잔액 100만원 이상 유지한 예금주에 한해 다른 은행의 자동화기기에서도 출금·이체수수료를 없앴다.
이는 네덜란드 아이엔지(ING)은행의 ‘아이엔지 다이렉트’를 본보기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엔지 다이렉트는 1997년 등장해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 9개국에서 1500만명 이상의 고객을 끌어들였다.
금융계에서는 강 회장이 무점포 다이렉트를 카드로 내민 이유는 민영화 작업과도 연계돼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산업은행의 전국 점포는 60개에 불과하다. 자산 규모로 보면 국내 대형은행 못지않지만 다른 시중은행에 비해 지점수는 절대적으로 적다. 이는 산업은행이 수출기업과 중소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특수은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 회장은 산은 다이렉트를 통해 산업은행이 특수은행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개인고객을 다양하게 확보해 향후 비싼 가격에 매각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애초에 강만수 회장이 산은금융지주 회장으로 발탁된 것은 산업은행 민영화 작업을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며 “그는 개인고객을 확보하려면 다이렉트 상품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실망스런 반응…대응은 "그래도 잘 될 것"
그렇다면 강 회장의 개인금융 강화를 위해 '야심차게' 선보인 다이렉트 뱅킹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어떨까.
일단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대다수다. 외국에서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국내에서는 정착에 실패한 상품인데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굳이 지주 회장이 간담회까지 자처해 가면서까지 내놀 만한 '획기적인' 상품은 아니다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산은 다이렉트 상품이 과거 HSBC은행 상품과 흡사하고 가입고객 절차 역시 비슷하다”며 “무엇인가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산업은행의 대응 역시 과거 HSBC은행의 반응과 흡사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가입신청 여부에 “폭발적이다. 고객들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과거 HSBC은행이 상품 출시 초기에 했던 말과 판박이다. 그런데 하루에 가입건수를 되묻자 “아직은 상품을 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개할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고객정보를 확인하는 직원이 몇명이냐는 질문에 “10명이 전부”라고 말끝을 흐렸다. 더욱이 가입신청이 폭발적인 의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영업직원 10명에 한해 문의가 많이 온다는 뜻”이라며 코미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이 관계자는 뒤늦게 “사실 아직은 가입건수나 그런 것은 많지 않다”면서 “현재 좋은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앞으로 내부 직원을 더 확보해 산은 다이렉트 판매에 심혈을 기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산은이 HSBC은행이 걸은 길을 다시 걷게 될지, 아니면 강만수 회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뀔 것인지 두고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