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집안 자랑이었다. 배우 하영은 8월 7일 방송된 KBS 2TV '옥탑방의 문제아들'에 출연해 자기 집안이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온 '4대 의사 집안'이라고 소개했다. 증조부가 일본에서 양의학을 배워 한양에 처음으로 양의원을 열었으며, 고종 황제까지 진료했다는 내용이었다.

<집안 자랑이 친일 조상 논란으로>
그러자 방송 직후 네티즌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하영의 증조부가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의사 면허증을 취득한 의사 안상호(1872~1927)라는 사실과 함께 친일 의혹을 제기했다. 이완용이 고문을 맡아 1916년 만들어진 민간단체 '대정실업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서 안상호라는 이름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1918년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완전히 내지화(일본화)된 가정이자 일선동화(日鮮同化)의 모범 가장'으로 소개됐으며 "매운 음식은 먹지 못하고 조선 옷은 한 벌도 없다"고 인터뷰한 기록도 드러났다.
논란이 커지자 소속사 비스터스엔터테인먼트는 10일 "증조부가 안상호는 맞지만, 친일 의혹은 사실무근"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료가 계속 나오자 하루 만인 11일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번복해 "추가 확인 결과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 기록이 실제로 존재한다"며 "충분한 검증 없이 성급하게 부인해 혼란을 드렸다"고 사과했다. 12일에는 하영 본인이 개인 인스타그램에 자필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동안 가족을 통해 단편적인 이야기만 들어 무지한 상태로 집안 자랑을 했다"며, 이번 기회에 증조부의 친일적 과오를 알게 되어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밝혔다. 소속사의 잘못된 초기 대처도 자신의 부족함 탓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파문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하영의 집안 언급이 포함된 KBS '옥탑방의 문제아들' 회차는 다시보기와 유튜브 클립 영상이 전면 중단되거나 비공개 처리돼 더 이상 볼 수가 없게 됐다. 광고계의 손절도 잇따라 삼성전자와 의류 브랜드 아티드(ARTID)는 하영이 등장하는 광고 영상을 즉각 비공개로 돌렸다.

<안상호는 일본에서 근대의학 교육받은 두 번째 대한제국인…일본 의사면허는 처음>
그렇다면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는 누구인가. 대한의사학회 학술지 대한의사학회(Korean Journal of Medical History) 제3권 제2호(1994년)에 게재된 의사학자 기창덕 가톨릭 교수의 논문 '의학계의 해외 유학생'에 따르면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선 두 번째로 일본에서 정규 의학교육을 받았다. 일본 의학교육기관에 입학해 처음으로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안상호의 3년 선배인 김익남이다.
김익남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다. 그는 갑오개혁이 시작된 지 2달 뒤인 1894년 9월 일어학교에 입학해 일본어를 배우다 학부(교육부에 해당)에서 주관한 일본유학시험에 합격해 이듬해인 1895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의 게이오키쥬쿠(慶應義塾) 보통과에서 7개월간 교육받고 졸업한 뒤 1896년 1월 도쿄치케이의원 의학교(東京慈惠醫院 醫學校)에 진학했다. 1899년 7월 전 과정을 마치고 8월부터 치케이의원에서 당직의원(當直醫員·수련의 격)으로 근무한 뒤 11월에 졸업했다. 김익남의 3년 후배인 안상호도 비슷한 과정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1902년 졸업한 그는 당직의원을 더 길게 하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의사면허를 받았다. 1907년 귀국해 개인의원을 열었다. 한양의 첫 한국인 개원의였던 셈이다.

<최초의 조선인 의사단체 결성, 칼 맞은 이완용 치료, 이토 민간추도회 준비위원, 고종 최후에도 이름 등장>
의사 안상호는 어떤 일을 했나. 김익남·안상호 등 조선인 의사들은 대한의사협회로 이어지는 최초의 한국인 의사 단체로 평가받는 '의사연구회'를 결성했다. 구한말인 1908년 10월 대한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의사들이 계림의학회를 결성하고 세력과 이권 확대를 꾀하자 그해 11월 의사연구회를 만들어 대항에 나선 것이다.
개원의 안상호는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1945년 이전까지 종현교회당으로 불림)에서 이재명 열사에 의해 단도로 습격당한 이완용을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치료받고 회복됐지만, 이재명 열사는 체포돼 이듬해인 1910년 9월 30일 처형당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강제로 빼앗은 1910년 8월 22일 국권피탈 직후였다.
안상호의 이름은 1909년 이토 히로부미 '국민대추도회' 준비위원 명단에서도 발견됐다. 일본 총리와 초대 조선통감부 통감을 지내고 추밀원 의장을 맡고 있던 이토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 의해 하얼빈역에서 사살됐다. 그 뒤 대한제국 왕실과 정부는 친일 단체인 한성부민회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서 이토의 장례식이 치러진 1909년 11월 4일 서울 장충단에서 1만여 명을 모아놓고 관민추도회를 열었다.
한성부민회는 이어 11월 26일 한성부민회관에서 민간 주도의 '국민대추도회'를 열려고 했지만, 단체끼리 의견이 맞지 않아 취소됐다. 당시 13도 대표 100명을 목표로 했던 준비위원 100명에 안상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다.
안상호는 고종의 마지막 순간에도 등장한다. 국권피탈 뒤 이왕직(옛 대한제국 황족의 의전과 담당 사무를 맡은 기구)의 촉탁의를 맡아 고종을 진료했기 때문이다. 안상호는 고종이 1919년 뇌출혈로 쓰러져 1월 21일 오전 6시 덕수궁 함녕전에서 만 66세로 세상을 떠날 당시 일본 의사와 함께 진료를 맡았다. 당시 고종 독살설이 퍼져 3·1운동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안상호는 고종이 즐기던 커피 또는 식혜에 독을 탄 배후 인물이나 가담자로 의심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고종 독살을 입증하는 증거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
안상호라는 이름은 1916년 결성된 친일단체 '대정실업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서도 발견된다. 줄여서 대정친목회로 불리는 이 단체는 한국사에서 중요하다. 1919년 3·1운동 뒤 일제가 조선인 회유를 위한 '내선융화'를 내걸고 문화정치를 시작하며 민간 신문 발간을 허용하자 1920년 조선일보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총독부에 저항하며 수많은 필화와 1년 정간 등 탄압을 겪었다. 조선일보는 그 뒤 1933년 광산 기업인 방응모가 경영난에 빠진 신문을 인수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이상호와 관련된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사연은 한 인물을 간단하게 재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인간은 평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적 사실은 시간이 갈수록 확인하고, 검증하고, 평가하고 판단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조선의 선각자 의사들>
김익남과 안상호가 일본에서 의학을 배우는 동안 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899년(광무 3년) 국립의과대학인 '의학교'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국내에서 근대 의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안상호의 도쿄치케이의원 의학교 3년 선배인 김익남은 일본에서 배운 의학을 바탕으로 바로 이 학교에서 교관(교수)을 맡아 제자를 길러냈다. 서울의대에 김익남의 동상이 서 있는 이유다.
의학교 1기는 3년 동안 동물학, 화학, 해부, 약물, 내과, 외과 등 16개 과목을 이수하고 1902년(광부 6년) 7월 졸업시험을 치렀다. 의학교 1기 졸업생 19명의 명단이 대한제국 관보에 실린 그해 7월 4일은 외국에 유학하지 않고 국내에서 공부한 근대 의사가 처음으로 탄생한 날이다. 관비 유학생인 안상호도 의학교 교관으로 발령받았지만 귀국하지 않아 면직됐다.

이들 외에도 구한말과 국권 상실 초기에 배출된 의사 중에는 개화정치·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선각자가 수두룩하다. 서구의 과학과 문물을 교육받은 의사들은 1910년 국권 상실 뒤 독립운동의 중심이 됐다. 1908년 의사가 된 제중원 의학교 1기 졸업생(중간에 세브란스에 위탁돼 세브란스 의학교 1기가 됨)은 7명 중 4명이 중국과 몽골로 망명해 독립운동가가 됐다. 1기인 박서양은 백정의 아들이었으나 실력이 뛰어나 세브란스 의전과 간호양성소 교수를 지냈다. 합리와 이성이 바탕인 서양의 의학 지식·술기를 익힌 이들은 "과학의 피는 신분의 피보다 더 붉다"며 고리탑탑한 신분 차별을 넘어서서 능력 중심의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갔다. 불평등과 불공정을 넘어 내 손으로 쌓은 실력과 일군 업적으로 평가받는 바로 그런 시대다.

<안상호 인터뷰는 영친왕과 이방자 결혼에 반발하는 민심 무마용>
언급된 안상호의 1918년 매일신문 인터뷰에는 배경이 있다. 1916년 고종의 아들 이은(1900~1907년 영친왕, 1907~1910년 대한제국 황태자, 1910~1926년 이왕세자, 1926~1947 창덕궁 이왕)이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해방 뒤 남편 성을 따서 이방자로 불림)와 약혼한 사건이다. 당시 조선 민중의 반발을 의식한 총독부는 조선인과 일본인 부부를 긍정적으로 선전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유학 출신의 조선인 의사 안상호와 일본인 처, 그리고 자녀가 일제의 선전에 동원된 셈이다. 양친왕과 이방자는 1919년 고종 붕어와 3·1운동 뒤인 4월 28일 1920년 결혼했다.
<까마득한 증조부의 역사적 의혹이 증손녀의 현실 활동에 영향을 끼쳐도 되는 걸까>
이러한 장구한 역사를 볼 때 증조부의 친일 의혹이 증손녀의 대중연예인 활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다. 제대로 연구하고 확인하면서 사회적 공감을 확보한 뒤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대신 단편적인 근거로 친일 프레임을 적용해 인물을 재단하는 건 과거 좌익 혐의자에 대한 우익의 '사상검증'이나 차이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는 역사 연구의 영역이지 현재의 기준으로 유죄, 무죄를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를 바탕으로 후손들을 비난하고 불이익을 주는 것은 역사가 현실을 잡아먹는 과거사 회귀형 연좌제라는 지적도 있다. 반면 친일 행위는 대한민국 침략이나 전복 시도와 마찬가지로 시효가 없다는 주장도 팽팽히 맞선다. 과거의 친일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과 후손들의 활동을 보는 시각과 관련해 사회적 숙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단 관심을 끌고 보자는 '슈스케식' 홍보·마케팅의 문제…시대가 바뀌고 있다>
개인·가족 서사까지 동원해 대중의 인기를 끄는 대중문화계의 홍보·마케팅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대중의 이목을 끌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는, 이른바 슈스케(대국민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퍼스타K) 방식의 연예인·홍보 마케팅 방식이 이제 임계점을 넘었다는 지적이다. 공정을 중시하는 청년층은 이목을 끄는 주변 스토리가 아닌 본인 개인이 쌓아온 능력과 잠재력, 그리고 업적을 중심으로 해당 연예인에 대한 호불호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하영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에 문제가 없었는지 곰곰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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