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갑'(甲)과 '을'(乙)은 그저 계약서상의 순서를 지칭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단순한 순서라고 하기에는 '갑을'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를 무시할 수 없다.
항공사 기내에서 라면이 맛없다는 이유로 승무원을 손찌검한 포스코에너지 A상무의 사례와 이 논란이 채 가시기도 전에 호텔 직원을 폭행한 프라임베이커리의 B회장 등 곪을 대로 곪은 우리 사회의 '갑을관계'가 수면위로 드러났다. 결국 A씨는 사표를 제출하고, B회장은 빵사업을 접었다.
갑을관계의 정점을 찍은 건 남양유업이었다.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욕설과 함께 제품을 떠넘기는 이른바 '밀어내기'를 강요했던 음성파일이 유튜브에 공개된 것이다. 파장은 컸다.
사건발생 6일째인 지난 9일 오전 남양유업은 대국민 사과를 하며 사태수습에 나섰다. 피해를 봤던 대리점에게 사죄의 뜻을 밝히는 한편 상생방안을 모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재발방지 계획에도 불구, 남양유업을 보는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다.
을에 대한 갑의 횡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한쪽은 갑, 다른 쪽은 을로 나뉘어 힘을 가진 갑이 그렇지 못한 을을 억압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공급사와 대리점뿐 아니라, 대기업-중소기업, 대형유통업체-납품업체 등 시장에서의 관계가 구조적으로 불평등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병훈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을
문제'는 경제 민주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며 "경제적으로 비민주적인 풍토 때문에 갑을관계가 생겨났다"고 지적했다.
◆ 동병상련 편의점업계
이번 남양유업 사태에 가장 먼저 동조한 이들은 편의점 점주들이었다. 3대 편의점 가맹점주들이 남양유업의 제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강행키로 한 것. 편의점 사장들은 이번 남양유업 사태에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었다.
전국편의점협회 소속 회원은 "남양유업 사태가 같은 을의 입장에서 굉장히 가슴 아팠다"며 "편의점업계 역시 5년 전만 해도 밀어내기 등 본사의 횡포가 심각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게 편의점 본사에서 각종 철만 되면 이벤트를 벌여 팔지도 못하는 물량을 공급한 일이다. 명절 선물세트 판매로 새해를 시작해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를 거쳐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을 겨냥해 카네이션을 팔고, 크리스마스 케이크 이벤트로 한해를 마감한다. 중간중간 보졸레누보 와인 행사와 여름철 수박 판매 등 본사에서 개발한 각종 이벤트는 매달 진행된다. 11월11일 빼빼로데이가 한참 지난 후에도 매장 한켠에 쌓여있는 빼빼로나 초콜릿들은 '을'의 고충을 안고 있는 징표다.
오명섭 세븐일레븐 가맹점협의회장은 수박 이벤트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본사의 영업직원은 전국적으로 600명에 달하고 이들이 7200여개의 매장을 관리한다. 본사에서 매장별로 수박 3개씩을 팔라고 지시하면 매장별로는 부담이 덜하겠지만 본사 입장에서는 2만1000개의 수박을 팔게 된다. 오 회장은 "매달 이러한 행사를 벌여 가맹점에 조금씩 부담을 떠넘기고 회사는 엄청난 수익을 챙겨왔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밀어내기 관행은 본사가 영업사원들의 등을 떠밀어 고착화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영업사원의 인사고과는 영업실적과 연관지어졌기 때문이다. 오 회장은 "영업사원이 동정심을 유발해 발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몇년 전부터 본사에서 일부 시정조치를 내려 그나마 이러한 밀어내기 영업이 줄었지만 아직도 많은 제보가 들어온다"고 말했다.
한 편의점 점주는 "예전에는 강제로 제품을 밀어내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점주의 동의를 구한 후에 제품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며 "예전만 해도 점주 동의 없이 임의로 발주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 대기업 '수퍼 갑' 횡포 여전
대기업에 제품 케이스를 납품하는 하청업체 A사는 회사가 요청한대로 제작을 완료해도 디자인 등이 변경돼 그대로 폐기처분하는 경우가 많다. 제품 케이스 10만개를 만들어달라는 대기업 구매팀의 요청에 이를 모두 만들었지만 케이스 디자인이 바뀌었다는 것. 재료비를 포함한 일체의 제작비용은 모두 A사가 떠안아야 했다.
A사 관계자는 "사용하고 남은 자재나 제작이 완료된 제품을 회수할 때는 제품을 주문한 기업에서 값을 치러야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며 "재료비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주고 알아서 처리하라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토로했다.
그는 "우리가 떠안지 않겠다고 하면 추후에 물량이 줄거나 거래가 끊길 수 있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할 수 있는 문제지만 대기업에서 먼저 자료가 남지 않게 한다"고 말했다.
B중소기업은 대기업의 발주에 입찰하기 위해 회사의 원가분석 자료까지 공개했다. 재료비는 물론 회사 직원이 몇명이고, 임금은 얼마인지, 건물 유지비는 얼마나 들어가는지 등을 상세히 기록한 원가분석 자료를 넘겨달라는 대기업의 요청이 있었던 것. 이러한 원가분석 자료를 확보한 대기업은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B업체로서는 얼마라도 남기려던 마진을 더 줄일 수밖에 없다.
B사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원가분석 자료까지 공개할 의무는 없지만 조건에 따르지 않으면 입찰조차 성사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모 대기업 관계자는 "공정한 거래를 위해 사내에서 여러 가지 교육을 실시하지만 교육에 그칠 때가 대부분"이라며 "현업에서는 여전히 하청업체를 압박해서 가격을 깎는 식의 업무 진행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 갑을 관계, 보완할 수 없나
문제는 사회적 약자인 '을'을 보호하고 권위를 지켜주려는 제도적 장치마저 미비하다는 데 있다. 이 교수는 "지난 대선에서 '경제민주화'가 큰 화두가 됐지만 새 정부는 또 경기 탓을 하며 실행을 차일피일 미뤘다"며 "정부가 강자의 횡포를 근절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한번에 다 바꿔지지는 않겠지만 시장에 강력한 경고를 줌으로써 잘못된 갑을 관행이 바뀌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여야 정치권은 이른바 '남양유업 방지법'을 추진 중이다. '밀어내기'나 '떡값 요구' 등 '갑'의 지위를 내세운 대기업의 횡포를 막기 위한 것이다. 여야는 공정위 법안 신설 또는 보완을 통해 오는 6월 임시국회에서 관련 입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8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