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7일, 취임 직후 첫 기자회견에서 리커창 중국 총리가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비장하게 밝힌 각오다. 정부와 국영기업의 역할을 축소해 민간부문이 경제성장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다짐인데 이 과정에서 성장률 하락, 경기침체 등 경착륙을 겪더라도 감내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시진핑 국가주석도 "단기적인 경제성장을 떠받치기 위해 희생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지원사격에 나섰다. 올 들어 중국의 각종 경제지표가 부진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4조위안(720조)을 쏟아 부었던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경기부양책을 기대하는 요구가 팽배하자 쐐기를 박은 것이다.
◆흉흉한 소문 나도는 中 금융가…문닫는 은행 나오나
앞으로 10년간 중국을 이끌어갈 새 지도부의 이 같은 입장표명은 중국이 겪고 있는 성장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연평균 9∼10%대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기록하던 황금기가 가고, 고갈된 성장 동력과 천문학적인 지방정부 부채, 부동산 거품 등 골치거리를 치유하기 위해 수술대 위에 올라야 하는 중국경제의 현실이 드러난다.
리 총리가 예언했던 손목을 끊는 아픔은 불과 3개월 만에 현실로 다가왔다. 6월 중순 상하이 금융가에는 중소형 은행 몇곳이 곧 파산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로이터통신은 중형규모의 은행 몇곳이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졌다는 미확인 소문이 있다고 전했다.
금융가의 공포는 유동성 부족과 금리 급등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은행간 단기금리인 1일물 환매조건부채권(레포, REPO)금리가 지난 20일 25%까지 치솟았고, 은행간 초단기금리인 시보(SHIBOR) 금리도 13%를 기록했다. 금리 집계가 시작된 지난 2006년 이후 최고치로 사상 초유의 일이다.
평소 2∼3%, 높아봐야 5%를 넘지 않던 은행간 단기금리가 이처럼 치솟은 것은 중국 은행들이 서로의 안전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는 리먼브러더스 파산 준비기간 동안 미국 은행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신용붕괴 현상을 연상시켰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PBOC)이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인민은행이 유동성을 공급, 즉 돈을 풀어 금리급등 현상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민은행은 거꾸로 행동했다. 시중의 자금을 걷어 들이는 통화긴축정책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재차 밝힌 것이다.
인민은행은 일부 은행의 디폴트 설이 한창 나돌던 지난 22일 저우샤오촨 인민은행장과 화폐정책위원회 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2분기 정기통화정책회의를 열었다. 인민은행은 이 회의에서 "최근 중국의 경제금융운용상황은 안정적이고 물가 역시 안정적"이라고 평가해 현 긴축기조 지속의사를 분명히 했다.
◆블랙먼데이 맞은 中 증시…오락가락하는 인민은행
주말이 지나고 이 같은 회의 결과가 공개되면서 중국 은행의 자금난이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성명에서 "중국에 10년 만에 닥친 최악의 신용경색은 대부분의 자금을 은행 간 단기금융시장에 의존하는 현지 소형은행들을 압박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월요일인 6월24일, 중국 증시는 말 그대로 '블랙먼데이'를 맞았다. 상하이종합지수가 109.86포인트(5.30%) 하락하며 1963.24로 마감했는데, 올 들어 처음으로 2000선이 무너진 것이다. 상당수 은행이 유동성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분석에 힘이 실리면서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주를 중심으로 폭락했다. 중국 폭락 공포에 한국 역시 코스피지수 1800선이 무너지는 등 아시아증시가 동반 하락했다.
중국 은행의 자금경색으로 시작된 이번 위기가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의 미국과 유사하다는 경고까지 제기됐다. 미국 주간금융지 배런스는 최신호에서 "중국의 최근 상황이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의 미국과 같다"고 경고했다. 중국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주택건설과 인프라 구축에 막대한 자금을 풀었는데, 그 후유증으로 금융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기설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중국증시는 지난 6월25일에도 장중 5% 이상 급락하다 막판에 극적으로 반등해 보합선에서 마감했다. 폭락하던 증시에 브레이크를 건 것은 인민은행이었다. 자금공급을 포함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반등에 성공한 것이다.
인민은행의 입장선회는 당초 예상보다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해 일부 금융기관의 자금경색 차원을 넘어 중국경제 전체에 대한 불안으로 확산되자 자금공급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 같은 조치에 따라 주가하락이 진정되고, 최고 13.44%까지 치솟았던 시보금리도 5%대로 떨어졌다.
◆그림자 금융 잡겠다는 中 당국…WMP 폭탄 터지나
하지만 시장의 불안은 여전하다. 인민은행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유동성 지원에 나설 것인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세조정을 통해 최악의 자금경색은 막겠다는 생각이지만 기본적으로 통화정책 긴축 기조에 변화를 주지 않겠다는 입장도 여전해 보인다.
그렇다면 인민은행이 금융위기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긴축기조를 유지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중국당국이 이번 기회에 금융기관 특히 중소은행, 투신사 등의 방만한 경영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들은 단기자금 시장에서 빌린 돈을 부동산과 금융상품에 투자해 버블을 심화시킨 중국판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의 주범으로 꼽힌다.
이와 관련, 중국 은행들이 최고 15%의 확정금리를 약속하고 발행한 WMP(자산관리상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WMP 판매잔액은 지난해 말 현재 10조위안(1800조원)에 달하는데, 이 막대한 금액이 중국의 지방정부와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흘러들어가 거품을 부추기고 있다. WMP가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를 부른 부채담보부증권(CDO)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문제는 이번 위기가 중국 정부 판단처럼 일부 금융기관의 문제점을 해소하는 선에서 그칠 수 있을지 여부다. 가뜩이나 중국경제가 올해 목표치인 7.5% 성장도 달성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자금경색이 확산될 경우 경착륙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서방의 주요 금융기관들은 이미 경쟁적으로 중국의 성장률을 하향조정하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가 올해 성장률을 8%에서 7.5%로 낮춘 것을 비롯해 골드만삭스, HSBC, 바클레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메릴린치 등도 중국의 경제성장에 부정적 견해를 보이고 있다.
다프네 로스 ABN암로 아시아증권 부서장은 "시장이 두려워하는 것은 중국정부와 인민은행이 진짜로 구조개혁을 계속하려 하느냐는 것"이라며 "만일 그렇다면 중국의 중소은행과 기업들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5세대 정치엘리트를 표방하며 출범한 시리 체제(시진핑 주석+리커창 총리 체제)가 이번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8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