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반대에 경찰도 업무과중 우려… 보험사만 사기 줄여 "환영"
#. 아침 출근길에서 가벼운 접촉사고가 발생한 A씨. 시간이 없던 관계로 그는 가입한 손해보험사에 전화해 사고를 접수했다. A씨와 사고를 당한 상대방 차량 역시 손해보험사 직원을 불렀다. 며칠 후 양측은 각각 사고에 대한 책임을 분할해 보험금을 받고 처리했다.
가벼운 자동차 접촉사고로 인해 차량이나 신체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흔히 사고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앞으로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고를 처리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국토교통부가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자배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어서다.
국토교통부는 보험사기와 자동차보험금 누수를 막기 위해 가벼운 부상을 입은 교통사고라 하더라도 경찰신고 없이는 보험금을 청구할 수 없도록 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를 두고 소비자와 손해보험사, 경찰 등 이해당사간의 의견은 엇갈리고 있다.
◆'사고증명서' 발급 의무화 추진
국토해양부가 추진하고 있는 법 개정의 핵심은 바로 '사고증명서'다. 자동차사고로 가벼운 신체 피해를 입은 사람이 보험사를 통해 치료비나 입원비를 받기 위해서는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것. 교통사고를 신고하고 공공기관인 경찰의 사고조사가 있어야만 보험금 청구가 가능해진다는 내용이다.
국토해양부가 이러한 법 개정을 추진하는 이유는 교통사고 사기 등으로 발생하는 '보험금 누수'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7월30일 단순한 교통사고일 경우 경찰에 사고를 접수하지 않아도 보험사로부터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다는 점을 노린 사기 일당이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송파경찰서에 따르면 이들 일당은 훔친 신분증 등을 이용해 자동차보험에 가입한 뒤 지난 1월부터 7월까지 총 22회에 걸쳐 교통사고가 난 것처럼 보험사에 신고해 총 1억600만원의 보험금을 받아 챙겼다.
이처럼 경찰에 신고하지 않아도 보험금을 타낼 수 있다는 점은 국내 손해보험사의 맹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손보사들은 일단 국토부가 추진하는 자배법 개정이 시행되면 보험사기로 지출되는 보험금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하는 분위기다.
현재 국내 자동차보험산업은 매우 어렵다. 다이렉트 상품의 활성화와 각종 할인정책으로 인해 수입보험료는 감소하는 반면, 지급되는 보험금은 늘고 있어서다. 여기에 각종 판매비 증가로 인한 합산비율이 상승하면서 자동차보험은 소위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게 업계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한 대형손보사 관계자는 "현재 시장을 봤을 때 자배법의 추진은 보험금 누수현상을 막아 손보업계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공신력 있는 경찰이 분석한 사고내용을 바탕으로 보험금 지급내용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는 점도 손보사들이 환영하는 또 다른 이유다. 이는 손보사의 민원감축에도 효과적일 것으로 전망된다.
손보사 관계자는 "사고의 책임 비중을 정하는 과정에서 고객의 민원이 많이 발생한다"며 "경찰이 이와 관련한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준다면 민원도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소비자는 반대
"교통사고로 보험금을 지급받을 때 경찰에 무조건 신고해야 한다면 금융소비자들의 불편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는 최근의 금융소비자 보호강화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국토해양부 법 개정 추진에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한 말이다. 자동차보험사기와 연관이 깊은 금융감독당국 수장이 국토해양부의 법 개정 추진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는 자동차사고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간단하게 합의만 하면 사고처리가 끝나는 것이었으나, 여기에 경찰이 출동해 사고경위를 조사하는 절차가 추가돼서다.
예를 들어보자. 한 자동차 운전자가 앞차의 뒤를 충돌하는 경미한 후미 추돌사고를 일으켰다. 지금까지는 앞차를 추돌한 뒷차 운전자가 본인의 연락처를 알려주고, 보험사에 연락해 사고 경위를 알리면 됐다. 이렇게 되면 가해자인 뒷차 운전자의 보험사 직원과 피해자인 앞차 운전자의 보험사 직원이 협의해 사고를 처리하면 됐다. 앞차 운전자는 보험사에 차량수리비와 병원비 등을 청구해 보험금을 받으면 모든 것이 완료된다.
그러나 만약 국토교통부의 법 개정 이후 이 같은 사고가 발생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후미 추돌을 일으킨 운전자와 앞차 운전자는 보험사 직원에게 연락하기에 앞서 경찰에 사고를 신고해야 한다.
후미에서 추돌을 일으킨 운전자는 경찰에 출석해 이것저것 사고와 관련된 조사를 받아야 하며 결국에는 교통사고 가해자로 몰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앞차 운전자 역시 병원비와 치료비 등을 보상받기 위해서는 경찰서를 찾아 '자동차 사고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이처럼 간단하게 양측의 합의를 통해 보험처리가 가능했던 것이 법 개정 이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고 반드시 경찰의 사고확인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손보사의 한 사고 담당자는 "보험계약자 입장에서 가해자로 몰리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또한 자칫 경미한 교통사고도 형사처벌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사고출동 경찰관도 울상
보험업계는 이번 법 개정으로 사고를 조사해야 하는 경찰의 인력난이 가중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보험사 인력으로도 처리가 가능했던 사고에 경찰까지 출동하면 그와 관련한 경찰인력이 더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자칫 보험금 누수를 막기 위해 출발한 제도의 취지가 무색하게 경찰인력과 그에 따르는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형손보사의 한 설계사는 "매년 발생한 교통사고 중 실제 경찰에 신고된 사고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며 "이러한 상황에서도 경찰의 업무가 매우 과도한 상황인데 모든 교통사고의 신고를 의무화하면 업무강도는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9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