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강한 나라 위해 주인의식 필요… 일본 성토 앞서 자기성찰을

우리 사회가 이만큼 먹고 살 수 있기까지는 선조들의 크나 큰 노고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던 36년 동안 독립을 위해 희생했던 많은 선조들에 대한 고마움과 광복의 소중함도 잊을 수 없다.

천안 독립기념관의 대형 태극기 게양을 생중계한 온라인 채널을 비롯, 지난 8월13일부터 광복절인 15일까지 '8.15 소셜 태극기 달기 프로젝트'가 진행돼 사이버 공간에 1만개의 태극기가 게양됐다. 이번 생중계 채널을 시청한 누적 접속자수는 전세계적으로 130만명에 달했다.

다만 아쉽게도 지난 8월15일 광복절에 태극기를 게양한 집은 많지 않았다. 중도일보에 따르면 공무원들이 많이 거주하는 대전시 둔산동 샘머리아파트의 광복절 국기 게양률은 17.3%였고, 세종시 정부종합청사 맞은편 도래마을 아파트의 국기 게양률은 27.6%였다. 이 정도는 양호한 편이며 대개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전국적으로 태극기를 게양한 가정은 '가뭄에 콩 나듯' 극소수에 그쳤다.

◆희생자 추모비 찾는 독일 지도자들

같은 날 일본에서는 도쿄 한복판에 위치한 야스쿠니신사 주변에 우익성향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신사에 참배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신사 밖에는 우익단체들이 군국주의 부활을 주장하는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며 심지어 "한국인을 죽이자"는 섬뜩한 구호까지 나왔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지난 4월23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침략 정의는 학계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국가 간의 관계상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발언했으며, 7월3일 당수 토론회에서는 "침략 여부 판단은 정치가가 아닌 역사가에 맡겨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총리부터 과거 일본의 침략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가 독일과 사뭇 대조적이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2차 세계대전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헌화를 하던 중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눈물을 흘리며 진정성을 보여줬다.

이후 독일의 지도자들은 매년 국회 연설을 통해 희생자 추모비를 직접 찾고 참회해왔다. 노르망디 상륙 60주년 기념행사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독일군들은 유럽을 압제하려는 살인적 시도 때문에 숨졌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의회 연설에서 호르스트 퀼러 독일 대통령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겸허하게 머리를 조아린다"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독일정부는 나치 전범의 공소시효를 아예 없애 현재까지도 재판에 회부한다. 베를린 곳곳에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추모하는 기념물이 세워졌고, 독일의 역사 교과서는 나치의 전범 행위가 어땠는지 가르친다.

2차 세계대전 패전 40주년 행사가 열린 1985년, 독일과 일본에서는 정반대 모습이 보였다. 서독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맹목이 된다"며 전쟁 책임에 대해 깊이 사죄했다. 반면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종전 이후 현직 총리로서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경술국치일을 잊지말아야

이처럼 독일의 총리와 대통령이 과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 앞장서는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과거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반성은커녕 역사 자체를 왜곡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의 과거사 인식이 퇴보하는 것만 탓할 게 아니라 그러한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직시하는 지도 스스로 짚어봐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 영토인 섬을 넘보고 있는 것처럼 역사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가 독립한 광복절이 생겨난 것은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 날인 국치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8월15일 광복절과 8월29일 경술국치일은 함께 기억해야하는 날이다. 경기도에서는 경술국치일에 조기를 게양하는 내용을 명시한 '경기도 국기게양일 지정 등에 관한 조례'(김주삼의원 대표 발의)를 공포해 시행에 들어갔다. 현충일(6월 6일) 외에 경술국치일에 조기 게양을 시행하는 것은 경기도가 처음이다.

SNS에도 "일본에 나라를 잃은 슬픔을 되새기고 애국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8월29일 경술국치일 조기 게양을 해주기 바랍니다. 각 사업소장 및 구청, 동 주민센터에서는 주민 홍보 및 직원교육에 협조해주고 태극기를 조기 게양합시다"와 같은 의견들이 올라오고 있다.

일본의 한국 침략은 일본 군함이 강화해협에 불법 침입해 포격을 가하고 양민을 살육·방화·약탈하는 만행을 한 운요호 사건(1875년, 고종 12년)에서 시작돼 러일전쟁 승리(1904년) 이후 본격화됐다.

무력을 앞세우며 1904년 한일의정서,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등을 차례로 체결해 1910년 8월29일 한일강제병합조약에 이르렀다. 일본은 조약문 자체에 형식상 문제가 없고 국제법상 조약에 준수했으므로 합법적인 한일병합조약이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한국이 원해서 합법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정치인들도 있다.

하지만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체결한 조약으로 법률상 무효라는 증거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후 한일합방이 대한제국 황제의 승인을 거쳐 체결됐다는 일본 측 주장이 틀리다는 사실도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순종 황제의 '칙유문' 등 일한병합조약과 관련된 문서를 통해 입증됐다.

서울대 이태진교수(국사학)는 "칙유문에는 국새가 찍혀있지 않고 모든 법령에 들어가는 황제의 친필 서명이 없는 대신 행정적 결재에만 사용한 어새만 찍혀 있어 국제법적으로 무효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일본은 순종황제가 완강히 저항해 칙유문에 국새와 친필서명을 받기 힘들어지자 이전에 강제로 빼앗아 보관하고 있던 어새를 찍어 칙유문을 위조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경술국치조약, 즉 일제병탄조약이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임이 입증됐지만 외부로부터 그런 일을 당하게 된 조선 내부상황도 인식해야한다.

운요호 사건을 통해 조선이 일본에 무기력하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결국 그 사건을 계기로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1876)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일본은 이미 수년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해 경제적으로 자본주의가 성립했다. 사회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됐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 외교관계를 맺고 문호를 개방해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조선보다 앞서 나갔다. 한국인 중에는 일본의 개혁에 감명을 받고 일본과의 협력이 우리나라에 이익을 가져오리라 기대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외국인의 절대적인 통치 하에서는 더욱이 통치자가 국수주의·군국주의·제국주의로 나갈 때는 대다수가 큰 불행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력·기술력·군사력이 국가가 자주성을 유지하면서 발전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임은 불변이다. 그런 힘은 상생의 협력을 바탕으로 강하게 만들어진다. 따라서 서민층에서 상류층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국가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사회공동발전을 향해 나가는 자기성찰도 필요할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9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