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산 가득했던 푸르름이 사라지고 흰눈 가득 내려앉은 덕유산자락
을미년 새해, 첫 눈꽃 트래킹을 덕유산으로 정했습니다. 겨울 설산의 운치로 치자면 설악이 으뜸이겠으나 눈꽃 탐스럽기로는 덕유산의 준봉들을 뒤로 세우기는 어렵겠지요. 눈이 많이 내리기도 하거니와 '얼음꽃'인 상고대가 잘 만들어지는 지형적 특색이 한 몫 하기 때문입니다.



덕유산이 남쪽에 있음에도 적설량이 많은 까닭은 겨울이면 습한 대기가 큰 산을 넘어오면서 많은 눈을 뿌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습기를 가득 머금은 안개가 나뭇가지에 얼어붙어 서리꽃 같은 상고대를 만들어 냅니다.



이른 새벽 서울을 출발할 때는 곧 눈이라도 내릴 듯 회색빛 하늘이 우울하게 다가왔었는데, 동튼 후의 덕유산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기에 은근히 기대했던 얼음꽃은 볼 수 없었습니다. 상고대는 해가 뜨면 곧 녹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겨울의 색은 흑백만이 아닙니다.
향적봉에 올라 더운 우유 한잔 손에 들고 백설이 가득 내려앉은 능선들을 바라봅니다. 멀리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이고 우뚝 솟은 지리산의 준령들이 보입니다. 발아래에는 온 산에 가득했던 초록빛은 사라지고 하얀 눈이 내리고 쌓여 은빛으로 빛나는 흰색 숲 천지입니다.



바로 앞의 능선들과는 달리 멀리 보이는 산들은 검게만 보입니다. 옛글들에서는 푸름은 검은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합니다. 파란 물감이 주룩 흘러내릴 듯한 푸른 하늘 아래 검푸른 산맥과 눈앞의 하얀 눈꽃세상….겨울산은 이처럼 파랑과 흰색, 그리고 검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 색은 어머니의 색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겨울은 삼라만상의 첫머리이지요. 그래서인가요, 시인 박노해는 겨울을 만물이 잉태되어 드러나는 시작으로 여겨 그 떨리는 희망을 '겨울 사랑'이라는 시에 담아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박노해 '겨울 사랑'



무성한 잡목이 뒤섞인 숲을 포근히 덮은 백설
기울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무성한 잡목이 뒤섞인 숲에는 잎도 꽃도 없는 겨울나무들에 내려앉은 눈들이 때때로 부는 겨울바람에 흔들려 흩어지곤 합니다. '백설이 분분'한 겨울숲은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다만 하얀 눈세상에서 빨갛고 노란 비닐봉지들이 종종 눈에 띄곤 합니다. 겨울의 색이 아니기에 더욱 눈에 거슬러 보입니다. 덕유산 설천봉-향적봉 구간에는 관광용 케이블카가 있어 탐방객이 주차장에서 설천봉을 지나 정상인 향적봉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기에 연간 70만명 가량이 이곳을 찿는다 합니다. 노약자나 장애인,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올라 첩첩한 산들의 장엄한 광경을 볼 수 있기에 고마운 일이나, 쓰레기가 넘쳐나고 훼손이 심해지면서 입산을 금지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합니다.



어쩌면 이번 눈꽃구경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깨가 점점 움츠려 듭니다.



☞ 글·사진 안미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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