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 소금 짐에 비지땀 쏟던 고개를 넘다
| 은비령에서 만난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첩첩산중인 강원도 인제, 가리산리에서 필례계곡을 따라 한계령휴게소 방향으로 가다보면 좌측으로 삼형제봉과 주걱봉, 그리고 필례령의 주산 가리봉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리봉(1518m)과 은비봉(1097m) 사이에 능선으로 이어진 고개가 바로 은비령이다.
은비령의 본래 이름은 큰눈이고개로 필례령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은비령은 어디서 나왔을까. 은비령은 본래 지명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인데 소설가 이순원의 동명소설 <은비령(隱秘嶺)>에서 따온 것이란다.
| 가리밸리 인근의 억새.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어서오세요” 손짓하는 은비령
가리산리 방재체험마을에서 짐을 꾸리고 길을 나섰다. 이름 그대로 꼭꼭 숨어 감춰있는 비경을 기대하며 옮기는 발걸음은 가볍다. 가리밸리 캠핑장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길가엔 억새가 잔바람에도 하늘거리며 길손을 반긴다. 마치 “어서오세요, 어서오세요” 하는 듯이 손짓하는 모양이 정겹다.
가리밸리 소나무 숲길을 지나면서 은비령의 숲길이 시작된다. 숲은 생강나무가 가득했다. 생강나무는 봄에 핀다. 하지만 벌써부터 노란 생강나무의 꽃과 향기가 온 산을 진동하는 듯하다. 상상만으로도 내년 봄이 느껴지니 길이 즐겁다.
| 가리산 방재체험마을.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소금 짐을 지고 넘나들던 고개
원시림을 헤치며 가리계곡 옆 절벽 위에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해 조심스럽다. 계곡물이 맑고 투명해서 손을 넣었다. 등골까지 파고드는 시원함으로 온몸을 떤다.
| 은비령길에서 만난 투구꽃.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이 길은 지금의 한계령 길이 생기기 전 양양에서 인제로 가는 옛 고갯길이다. 선인들이 양양에서 무거운 소금 짐을 지고 인제로 가 먹을 양식을 구해 다시 돌아가던 곳이다. 그들의 일상을 재구성해본다.
| 은비령.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필례, 마의태자의 꿈
은비령을 뒤로 하고 필례약수를 향해 내려간다. 내려가다가 올라오는 사람을 만난다. 이곳은 길손이 드문 데다. 누군가 궁금해 물어보니 인제천리길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시월 은비령을 걷는 행사를 위해 길을 정비하는 중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산하의 혈맥을 만들고 옛길을 복원하는 이들에게 무한한 박수갈채를 보낸다. 필례약수로 내려가는 길은 단풍이 군데군데 형형색색으로 수를 놓았다.
| 필례약수.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필례의 지명은 주변 지형이 베 짜는 여자인 필녀(匹女)의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또한 피난처라는 뜻도 갖고 있다. 주변의 이름이 진을 친다는 원진개(遠鎭介), 군량을 쌓아놓는 군량밭(軍糧場), 소나 말을 키우던 쇠물안골(牛馬洞), 척후를 보던 망대암(望臺岩) 등 전쟁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 필례계곡.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필례약수와 단풍터널
필례약수를 나와 필례계곡을 향하는 길은 단풍터널이다. 벌써 반은 붉게 물들어 마음을 이곳에 붙잡아 놓는다. 필례로를 따라 계곡은 우렁차게 소리를 내며 흐른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바위를 부딪치며 하얀 포말로 산산이 부서진다. 계곡에 가지를 드리운 나무는 제 잎의 단풍으로 계곡 물색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아직은 완전하지 않지만 머지않아 붉음의 세상이 되리라. 필례로를 따라 계곡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은비령의 시간은 멈췄다. 다음에 와서 시간을 이어줘야 한다.
| 필례로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
☞ 본 기사는 <머니S> 제616호(2019년 10월29일~11월4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