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령, 허구와 현실을 넘나들다
첩첩산중, 소금 짐에 비지땀 쏟던 고개를 넘다


은비령에서 만난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은비령에서 만난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오래 전 기억이 은비령(隱秘嶺)으로 내몰았다. TV에서 우연히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내리는 눈이 은색으로 반짝거리며 은비은비(隱秘銀飛)해요’라는 것을 본 뒤 은비령을 늘 염두에 뒀다. 겨울이 아닌 가을 단풍이 시작할 때의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첩첩산중인 강원도 인제, 가리산리에서 필례계곡을 따라 한계령휴게소 방향으로 가다보면 좌측으로 삼형제봉과 주걱봉, 그리고 필례령의 주산 가리봉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리봉(1518m)과 은비봉(1097m) 사이에 능선으로 이어진 고개가 바로 은비령이다.


은비령의 본래 이름은 큰눈이고개로 필례령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은비령은 어디서 나왔을까. 은비령은 본래 지명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인데 소설가 이순원의 동명소설 <은비령(隱秘嶺)>에서 따온 것이란다.

가리밸리 인근의 억새.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가리밸리 인근의 억새.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어서오세요” 손짓하는 은비령
가리산리 방재체험마을에서 짐을 꾸리고 길을 나섰다. 이름 그대로 꼭꼭 숨어 감춰있는 비경을 기대하며 옮기는 발걸음은 가볍다. 가리밸리 캠핑장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길가엔 억새가 잔바람에도 하늘거리며 길손을 반긴다. 마치 “어서오세요, 어서오세요” 하는 듯이 손짓하는 모양이 정겹다.

가리밸리 소나무 숲길을 지나면서 은비령의 숲길이 시작된다. 숲은 생강나무가 가득했다. 생강나무는 봄에 핀다. 하지만 벌써부터 노란 생강나무의 꽃과 향기가 온 산을 진동하는 듯하다. 상상만으로도 내년 봄이 느껴지니 길이 즐겁다.


가리산 방재체험마을.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가리산 방재체험마을.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인적이 드문 길을 탐험하듯 올라간다. 다행히 인제천리길 표지가 곳곳에 붙어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무성한 원시림은 태곳적 그대로인 듯하다. 어떤 나무는 고사목이 돼 쓰러져 길을 가렸다. 숲길에서 오래된 집터의 흔적도 만났다. 이곳이 한때는 사람들이 살았음을 짐작케 한다.
◆소금 짐을 지고 넘나들던 고개

원시림을 헤치며 가리계곡 옆 절벽 위에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해 조심스럽다. 계곡물이 맑고 투명해서 손을 넣었다. 등골까지 파고드는 시원함으로 온몸을 떤다.

은비령길에서 만난 투구꽃.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은비령길에서 만난 투구꽃.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아름다운 원시림과 계곡을 두번 건너자 가파른 산길이다. 고갯마루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모아서 마지막까지 올라간다. 나무 틈새로 하늘이 보이고 이내 가리봉과 은비봉 사이의 능선 고갯길은 은비령(필례령)이다. 은비령에 올라서자 밑에서 올라오는 바람에 흘린 땀이 식어버린다.
이 길은 지금의 한계령 길이 생기기 전 양양에서 인제로 가는 옛 고갯길이다. 선인들이 양양에서 무거운 소금 짐을 지고 인제로 가 먹을 양식을 구해 다시 돌아가던 곳이다. 그들의 일상을 재구성해본다.

은비령.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은비령.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필례 주막에서 전해준 막걸리 한사발 들이키고 나선 때가 아침인데 이제야 큰눈이고개다. 무거운 소금을 바지게에 가득 싣고 양양에서 나흘 전에 출발했다. 자꾸 바지게 틈새로 간수가 새어 나와 옷이 소금에 절여졌다. 몸도 소금에 절여진 듯 무겁고 파김치다. 혼자가면 위험하기에 무리를 이뤄 등짐을 지고 노래를 부르며 힘든 어깨를 달랬다. 내일까지는 하우고개를 넘어 인제에 들어가야 되는데….’
◆필례, 마의태자의 꿈

은비령을 뒤로 하고 필례약수를 향해 내려간다. 내려가다가 올라오는 사람을 만난다. 이곳은 길손이 드문 데다. 누군가 궁금해 물어보니 인제천리길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시월 은비령을 걷는 행사를 위해 길을 정비하는 중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산하의 혈맥을 만들고 옛길을 복원하는 이들에게 무한한 박수갈채를 보낸다. 필례약수로 내려가는 길은 단풍이 군데군데 형형색색으로 수를 놓았다.

필례약수.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필례약수.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필례약수에 도착했다. 벌써 많은 사람이 물맛을 보기 위해 늘어섰다. 철분이 많고 위장병이나 피부병에 좋다고 알려진 약수다. 기다려 맛본 물맛은 약간 떫었다.
필례의 지명은 주변 지형이 베 짜는 여자인 필녀(匹女)의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또한 피난처라는 뜻도 갖고 있다. 주변의 이름이 진을 친다는 원진개(遠鎭介), 군량을 쌓아놓는 군량밭(軍糧場), 소나 말을 키우던 쇠물안골(牛馬洞), 척후를 보던 망대암(望臺岩) 등 전쟁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필례계곡.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필례계곡.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어째 이 깊은 산중에 어울리지 않는 지명일까. 신라 마지막 왕태자 마의태자의 이야기 때문이다. 이곳에 온 태자를 따라 신라의 유민이 모이고 재기를 꿈꾸며 기회를 엿봤다던 전설 때문이 아닐까.
◆필례약수와 단풍터널

필례약수를 나와 필례계곡을 향하는 길은 단풍터널이다. 벌써 반은 붉게 물들어 마음을 이곳에 붙잡아 놓는다. 필례로를 따라 계곡은 우렁차게 소리를 내며 흐른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바위를 부딪치며 하얀 포말로 산산이 부서진다. 계곡에 가지를 드리운 나무는 제 잎의 단풍으로 계곡 물색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아직은 완전하지 않지만 머지않아 붉음의 세상이 되리라. 필례로를 따라 계곡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은비령의 시간은 멈췄다. 다음에 와서 시간을 이어줘야 한다.

필례로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필례로에서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소설로 탄생한 은비령(필례령)은 가상의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의 공간이 됐다. 은비령을 넘는 동안 원시림의 아름다운 모습은 내내 감동이다. 길에 밟히는 풀섶에도, 아름드리 나무 하나에도 제대로 숨 쉬는 자연의 위대함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집터임을 짐작케 하는 돌무더기, 오랜 기간 이어온 옛길에 서린 선인의 땀도 보았다. 넓고 크다고 항상 옳은 것만 아니다. 이렇게 면면히 이어온 작은 소로(小路)에서 더 큰 울림을 보기도 한다. 큰 교훈을 얻는 소중한 길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16호(2019년 10월29일~11월4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