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빚의 무게가 버거운 서민들의 삶
악마처럼 다가왔던 빚, 그 무서움의 대가

“만삼천오백원입니다.”

조국대학병원 응급실 원무과 앞에서 가슴 졸이던 한조국은 “휴~”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젠 됐다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이렇게는 살 수 없으니 뭔가 결단이 필요하다는 각오와 후회의 한숨이었다.
그날은 웬일인지 퇴근을 빨리 했다. 집사람이 깜짝 놀란 듯 쳐다봤다. 눈으로 ‘이렇게 일찍 귀가하는 것을 보니 뭔가 사고 친 거 아닌가?’ 하고 물었다. ‘아무 일 없다’고 안심시킨 뒤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거실에 앉아 쉬었다. 유치원 다니기 시작한 큰딸에게 동화책을 조금 읽어 주고 막 뛰기 시작한 둘째 딸을 무동 태워주기도 했다. 그리고 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꾸미 아빠 빨리 일어나 봐요…”


잠결에 몸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집사람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벌떡 일어나니 집사람이 큰딸을 안고 안절부절못했다. 갑자기 열이 39℃까지 올라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생각할 것 없이 후다닥 꾸미를 안고 병원으로 뛰었다. 다행히 골든타임 안에 병원에 도착해 응급처치를 함으로써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한조국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의 지갑에는 단돈 만칠천원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응급실 비용이 그보다 많이 나오면 병원비를 내지 못하고 망신을 당할 판이었다. 신용카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많은 게 탈이었다. 대여섯장 되는 신용카드는 이미 돌려막기로 한도가 꽉 차 더 이상 돈을 자판기처럼 토해내지 못했다.

◆막다른 골목에 꽉찬 대출한도의 카드

그의 다급했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시곗바늘을 잠시 몇년 전으로 돌려보자. 그때는 1985년부터 시작된 3저 효과로 급등했던 주가와 부동산값이 급락한 때였다. 3저란 유가와 달러값 그리고 금리가 동시에 낮아 한국 경제가 1988년 말까지 호황을 누리게 된 것을 뜻한다. 3저 효과로 종합주가지수는 1989년 4월1일 1004.77까지 오르며 사상 처음으로 1000을 돌파했다.


아파트값도 급등해 정부는 집값 안정을 위해 그 유명한 토지공개념을 도입했다. 위헌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까지 시행한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 ‘개발부담금제’가 그것이다. 이 여파로 종합주가지수는 1989년 4월 최고치를 기록한 뒤부터 급락세로 돌아섰다. 아파트 가격도 슬금슬금 떨어지기 시작해 지역에 따라서는 최고가보다 30% 이상 하락했다.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아파트값이 급락하자 지금이 살 때라는 유혹이 악마처럼 다가왔다. 2억원까지 올랐던 32평형 아파트가 1억5000만원까지 떨어졌으니 유혹에 넘어갈 만했다. 악마는 은행에서 대출 받아 사라고 꼬드겼다. 그때까지 빚의 무서움을 알지 못했던 한조국은 조금 망설이다 결정했다. 1억5000만원짜리 아파트를 사면서 절반을 은행에서 빌렸다. 당시 은행 일반대출금리는 연12%였다. 신탁대출금리는 14%였고 회사채 수익률은 16% 수준, 명동 사채금리는 연 30%를 훌쩍 뛰어넘었다. 요즘 기준으로 하면 가히 사람을 죽일 정도의 살인적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악마의 유혹이자 비극이었음은 곧 드러났다. 그는 당시 받은 월급으로 이자를 내기가 빠듯했다. 그래도 바닥으로 떨어진 아파트를 사두면 곧 오르기 시작할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 월급으로 이자를 내기 힘들면 신용카드를 새로 발급 받아 현금서비스로 돌려 막았다. 그렇게 시작된 돌려막기가 2년 넘게 이어지다 결국 큰딸의 야간 조국대학병원행이 일어났다.

결단의 결과는 두가지뿐이다. 잘되는 것과 잘못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비극은 잘되는 것보다 잘못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그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대가도 매우 쓰라렸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그저 잘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에 그의 운명을 내맡긴 스스로의 욕심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의지할 데라곤…

한조국은 꾸미를 통해 전해진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뜻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점을 보러 갔다. 주위에서 가끔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용하다는 집을 소개받았다. ‘개명 천지에 무슨 점이냐?’는 비아냥이 들리기도 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절박했다.

“남쪽으로 이사 가세요. 날일(日)이나 빛광(光), 볕양(陽), 밝을명(明)이 들어 있는 동네라면 더욱 좋습니다…”

정말로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렸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점 보러 왔겠는가라는 판단으로 이사하라는 말은 그럴듯했다. 그런데 일, 광, 양, 명이 들어 있는 남쪽 동네로 이사 가라니…. 그래도 그 뜻을 저버릴 수 없었다. 집사람에게 이사해야겠다고 말을 하니 선선히 그러자고 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으면 한마디 이의도 없이 이사 가자는 말에 동의했을까.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아렸다. 남쪽 동네로 집을 보러 다녔다. 그런데 서울 남쪽에 일, 광, 양, 명이 들어 있는 동네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남쪽에서 양자가 들어가는 양동으로 정했다. 양동은 한자로 '良동'이지만 발음이 양이어서 효과는 같을 것으로 여겼다.

한조국은 양동으로 이사하면서 집도 줄였다. 32평 아파트, 그것도 15층 가운데 7층에서 26평 빌라, 그것도 1층으로 옮겼다. 은행 대출도 전보다 절반 이하로 줄였다. 그동안 월급이 좀 올라 그 정도 대출이면 견딜 만하다고 판단했다.

그가 찾았던 점집이 용했던 것일까. 그가 빚의 무서움을 알고 욕심을 줄인 덕분일까. 아니면 그분이 그를 그렇게 이끌었을까. 양동으로 이사한 뒤부터 신기하게 일이 술술 잘 풀렸다. 은행만 웃게 만드는 이자가 줄어드니 살림살이가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집사람과 딸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의 선택 범위도 넓어졌다. 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던 집사람에게 ‘작은 차 큰 기쁨’을 사 주었다. 큰딸을 업고 작은딸은 배 속에 있어 배부르고 등 따듯하다는 것을 풍자로 이겨냈다.

IMF 외환위기의 광풍이 불어닥쳤을 때는 가까운 이웃나라로 연수 가서 큰아들을 낳았다. 돌아와서는 둘째 아들도 얻었다. 일이 잘 안 풀려 회사를 옮겼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나았다. 그렇게 6년을 살다가 큰재동으로 옮겼다. 지금은 빚을 한푼도 갖지 않고 이슬을 먹고 살고 있다. 빚이 많으면 집안이 망하고(多債亡家, 다채망가) 빚이 없으면 자유롭고 행복하다(無債自福, 무채자복)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며….

☞ 본 기사는 <머니S> 제624호(2019년 12월24~3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