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시대© 뉴스1

(서울=뉴스1)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 "건전지를 다량으로 사는 사람, 구두창이 물에 젖는 것을 피하는 사람, 수시로 여행이나 이사하는 사람, 변소나 한강다리에 낙서하는 사람…간첩은 시간과 장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
현재의 관점에서 얼토당토않은 기준일 수 있지만 1966년 1월에 대한뉴스 '이것이 간첩이다'에 실린 간첩식별 요령이다. 실제로 이렇게 어이없이 잡혀가 곤욕을 치른 사람이 많았다.

신간 '간첩 시대'는 김정인 춘천교육대 사회교육과 교수를 비롯해 역사학자 8명이 해방 이후 조작간첩 사건의 배경과 사례를 집대성한 책이다.


책은 총 8장으로 짜였다. 1장부터 4장까지는 조작간첩 사건의 배경과 공안기구의 실태, 남파공작원 등을 살핀다.

공안기구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제정된 국가보안법에서 활동의 법적 근거를 제공받았다. 박정희 정부 시절은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이하 보안사), 대공경찰 등 공안기구들도 크게 확장됐으며 간첩 조작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

공안기구들은 1970년대에 들어와 남파간첩이 줄자 아예 간첩을 만들어냈다. 이들 기관은 서로 경쟁하며 의심되는 사람을 고문하거나 약점이 있는 사람을 잡고 그와 뒷거래를 해서 원하는 그림을 그려냈다.


수사기관이 최고 권력자에게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간첩을 조작하거나 위로부터 성과를 내라는 압박을 받아 수동적으로 조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수사관은 거액의 포상금과 함께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간첩을 찾아내려 애썼다. 이들이 힘도 연고도 없는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만 받아놓으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렸다.

이들에 의한 간첩 조작은 민주화 이전 독재시대에 주로 발생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조작 사건은 여전히 나타났고 심지어 2010년대에도 이어졌다. 독재정권이 사라졌지만 공안기구의 활동을 뒷받침해주는 법적 근거인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4장부터 8장까지는 월북자 가족, 재일한인, 납북귀환어부들이 조작간첩으로 바뀌는 과정을 구체적 사례로 살펴봤다.

월북자 가족 간첩 조작 사건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이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전쟁기 월북자들을 간첩으로 남파하는 사업을 1960년대에 추진했다.

남파 간첩들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을 접촉해 북한 방문을 권유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남한의 가족이나 친척이 간첩의 권유에 따르거나 마지못해 잠깐 방북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연락이 끊긴 채 무관한 삶을 살았다.

남파 간첩과 접촉한 이후 10~20년간 평범한 삶을 살아온 남한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공안기구에 의해 불법감금과 잔혹한 고문을 당한 뒤 오래전부터 지하에서 고정간첩으로 활동해온 대규모 가족 간첩단으로 둔갑됐다.

정부는 1968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사건 이후부터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정책을 바꿨다. 나포 선원들이 제공한 정보가 북한 무장공비 침투에 이용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책은 조작간첩 사건의 기획과 실행을 주도한 공안기구의 변천 과정이나 한국 간첩 조작의 역사를 총망라한다. 이런 내용을 통해 '조작 간첩'이 독재체제에서 일어난 반민주적 비극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 간첩 시대/ 김정인, 황병주, 조수룡, 정무용, 홍정완, 홍종욱, 유상수, 이정은 지음/ 책과함께/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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