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에서 36년을 일하고 부회장까지 올랐다. 그룹의 인수합병(M&A)과 신사업을 지휘했고 조직문화 혁신을 이끌었다. 이쯤 되는 경영인이 회고록을 낸다고 하면 으레 성공 비결이나 경영철학부터 떠올리게 마련이다. 이동호 전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꺼냈다. 잘한 일보다 실수했던 일, 화려했던 순간보다 별것 없었던 일상의 기억을 골라 책에 담았다.
이 전 부회장이 자전적 에세이 '긴 여정의 첫걸음'을 펴냈다. 현대백화점그룹에서 36년간 근무하고 2017년 부회장에 올라 그룹 경영 전반을 이끌었던 그가 '부회장 이동호'라는 명함을 내려놓고 자연인으로 돌아가 지난날을 되짚었다.
요즘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을 골라 보여주는 데 익숙하다. 비싸고 맛있는 음식, 이국적인 휴양지의 풍경, 오랫동안 벼르다 장만한 사치품을 근사하게 찍어 SNS에 올린다. 그렇게 잘 고른 삶의 한 장면에 부러움과 시샘이 뒤섞인 '좋아요'가 차곡차곡 쌓이기를 기다린다. 남에게 보여주는 인생이라면 이왕이면 더 근사하고 더 행복해 보여야 하는 시대다.
이 전 부회장의 화법은 정반대로 간다. 36년 직장생활 끝에 대기업 부회장까지 오른 사람이니 골라 자랑할 만한 장면이야 차고 넘칠 터다. 그런데 그는 전략적 M&A를 어떻게 성사시켰는지, 신사업을 어떻게 키웠는지를 늘어놓는 대신 19금 영화를 몰래 보다가 매질을 당했던 사춘기 소년,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군대에 가기 싫어했던 청년, 음치 때문에 주눅 들었던 직장인을 불러낸다. 성공한 경영인의 지나온 길이라기보다 한 사람이 나이 들어가며 비로소 웃으며 꺼내놓을 수 있게 된 기억들에 가깝다.
많은 회고록이 지나온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골라 확대한다면 이 책은 그 반대편을 들여다본다. 잘 보이기 위해 삶을 편집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최고의 자리에 올라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삶이 "언제나 고음처럼 찬란할 수만은 없다"며 때로는 한 소절쯤 조용히 넘어가도 괜찮다고 적었다.
그 기억의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다.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60리 영산포 장터길을 걸었던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와 이웃까지 긴 여정을 함께 지나온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반백년의 동행' 부분은 오랜 세월 곁을 지켜준 아내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처럼 읽힌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길수록 사랑을 말하는 일은 오히려 쑥스러워지기 마련이다. 저자는 에세이라는 형식을 빌려 그 말을 늦게나마 꺼내놓는다.
노년의 바람도 거창하지 않다. 저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를 떠올리며 이미 일어난 고통에 스스로 또 다른 고통을 보태 마음의 평온을 잃는 일만은 피하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인생의 마지막을 찌그러진 냄비에 남은 따뜻한 라면 국물에 찬밥을 말아먹는 순간에 빗댄 대목에서는 부회장이라는 직함보다 소탈한 한 사람의 얼굴이 선명해진다.
인생은 꼭 대단해야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에게도 어린 날이 있었고 실패가 있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책은 성공한 경영자의 화려함보다 평범한 일상을 조용히 곱씹게 만든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누구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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