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한상희 기자 = 터닝 포인트: 2020년 2월 대구는 한국 내 코로나19 1차 대유행의 진원지가 됐다.
자신이 무시당하거나 방치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령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아버지는 추방된 기분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는 평생을 공사판에서 인부로 일해왔다. 일흔 살에는 경비원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이가 너무 들어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되자 시립노인정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다른 노인들과 장기를 두거나 공공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근처 공원을 산책하곤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 사태로 인해 시설이 일제히 폐쇄되자 아버지와 연결돼 있던 모든 사회적 관계를 이어주는 경로가 차단됐다.
아버지는 서울의 아들과 며느리 집에 있는 20년간 살아온 작은 방에 갇혀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다. 말 수는 줄어들었고,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작았다.
2020년 2월 대구에서는 집단감염이 빠르게 확산 하는 등 코로나19 사태가 불길한 조짐을 보였다. 전망은 암울했다. 폐쇄된 병동과 요양원을 중심으로 전염이 확산하고 사망자가 급증하면서 코로나19가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에 촉수를 뻗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아버지는 이미 살아오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이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가던 1940년에 태어나,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어린아이였고, 1960년대에 시작된 무자비한 산업화 시대에는 청년이었으며, 민주화의 충격파가 닥쳤을 때는 중년 남성이었다.
아버지는 전쟁 직후 겨우 열 살의 나이에 당신의 아버지,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공산당원에게 살해되는 일을 겪었다. 하지만 경찰은 얼토당토않게도 할아버지를 공산당원으로 간주했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때마다 "너희 할아버지는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라고 말했다. 마치 그 일을 아는 것이 다른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열쇠인 것처럼 말이다.
연좌제로 인해 아버지는 모든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건설 현장 곳곳에서 일했으며, 한 번도 휴가를 내어 여행을 간 적이 없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자신이 벌지 않는 것을 취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노름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삶은 아버지의 선행을 보상하지 않았다.
한 번은 작업 도중 고층 건물에서 추락할 뻔한 일도 있다. 또 한 번은 외국에서 일하다가 서류 미비로 추방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너무 일찍 아내를, 즉 나의 어머니를 병으로 잃었다.
아버지는 몇 년 전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이웃들과 경찰로부터 할아버지에 대한 증언을 확보 할 수 있었다. 이후 할아버지의 사망 원인을 재조사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한 긴 법정 싸움을 벌였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이 일은 성공을 거뒀다. 아버지는 마침내 당신이 살아온 고단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받는 듯 대단히 기뻐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곳은 출입이 제한됐다. 심지어 할아버지가 명예롭게 새로 안치된 국립현충원에도 갈 수 없게 되자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격리 상태에서 노후를 보 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광주 남서부의 고향 마을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늘 다짐했지만, 이제 그에 대한 결정권은 코로나19 로 넘어갔다. 만약 여생을 홀로 보내야 한다면 이왕이면 가장 좋아하는 언덕과 시냇가 근처에서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버지는 서울과 광주 사이를 비밀리에 오가며 거주할 작은 집을 하나 임대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말하면 우리가 반대하거나 돕겠다고 고집할 것을 알고 한 일이었다. 그리고 입주한 다음 날에야 우리에게 알렸다.
두 언니와 오빠와 나는 아버지에게 몹시 화가 났다. 고위험군인 노인이 어떻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혼자 지낼 수 있다는 말인가?
온라인상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배달이 되는 데 익숙한 우리는 고립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독이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나이가 드는 게 어떤 것인지도, 안전이라는 명목으로 집에서 무시당하고 방치되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몰랐다.
언니들과 오빠와 나는 아버지를 서울로 모시기 위해서 급히 광주행 열차에 올랐다. 안전을 위해 고립을 유지하고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득할 작정이었다.
기차는 텅 빈 상태였다. 그날이 2020년 2월 29일이다. 813명의 확진자가 새로 보고되어 1월 20일 이후 가장 많은 환자가 발생한 날이었다. 우리는 남쪽으로 2시간 30분 동안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를 만났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가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아버지가 임대한 집은 우리가 전부 자기에는 지나치게 좁았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 머물고 모임을 피하라는 검역 당국의 권고를 어긴 채 작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거의 텅 빈 호텔은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 언니들과 나는 아버지가 여기 남겠다고 고집하는 것을 걱정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늦게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식당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광주 거리는 마치 버려진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문을 연 식당을 찾지 못해 먼 곳까지 걸어갔다. 마침내 우리는 대학병원 근처의 어느 재래시장에 도착했다.
"내가 열다섯 살 때 말이다." 아버지가 말했다. "수박을 팔기 위해 이 시장까지 걸어 다녔단다."
나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내가 본 아버지의 가장 어린 모습은 스무 살 무렵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에 찍은 왠지 근엄해 보이는 사진이었다.
인생은 얼마나 많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 지금 아버지가 걸치고 있는 핼쑥하고 쓸쓸해 보이는 얼굴 에서는 수박을 팔기 위해 십여 킬로미터를 걸어온 고집 센 소년이나 대도시로 이사갈 준비를 하느라 긴장한 청년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참 날도 덥고 길도 멀었지."
그 말과 함께 아버지의 다른 얼굴들이 겹쳐졌다. 혼자 힘으로 자신의 몸을 일으킨 분이었다. 이는 아버지의 자존심의 뿌리이자 줄기였다.
아버지의 여동생인 우리 고모는 복숭아를 재배하기 위해 고향에 남았다. 우리는 그 복숭아를 먹으며 자랐지만, 2020년에는 복숭아를 단 한 개도 맛볼 수 없었다.
고모는 코로나19 발병 전에 다리를 심하게 다쳤고 아직도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다. 코로나19가 계속 확산하자 병원들은 방문객의 출입을 차단했다. 아버지는 벌써부터 다시는 여동생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고모의 아들에게 들은 말을 우리에게 들려줬다. "너희 고모가 말이다. 모두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한다는구나."
병실에서 옴짝달싹 못하며 자신이 버려졌다고 믿는 고모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모든 노인을 생각하자 불편한 감정들이 엄습해왔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였다. 우리는 모두 결국 인생의 말년에 병든 노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간신히 시장에서 문을 연 식당을 한 곳 찾아냈다. 아침 식사 후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우 리는 병원을 지나쳤다. 전신 보호복을 착용한 의료진들이 병원 출입구 밖에 설치된 코로나19 선별 진료소에서 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인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우리는 아침 뉴스에서 이곳에 온 사람이 코로나 19 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보였으며 이제 그 확진자와 접촉한 모든 사람을 검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선별진료소의 광경과 코로나19 확진자가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초조해졌다.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아버지를 잃게 될까봐 겁이 났다.
아버지는 지하철 입구에서 손잡이를 꽉 붙잡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지하철 안에서는 균형을 잡기 위해 기둥을 움켜잡았다.
젊은 사람이라면 아무 곳에도 손대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노인들에게는 불가능했다. 아버지가 아무리 조심하려고 해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의 호흡과 손에 접촉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만큼 감염에 더 많이 노출돼 있었다.
코로나19는 이렇게 노인들을 앗아간다. 누구든 고혈압으로 고생하는 어머니, 당뇨로 고생해 온 할머니, 만성 질환을 지닌 자매나 누이를 잃을 수 있다. 우리는 이들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질병 예방의 의무는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우리 자신을 생각해보는 이른바 역지사지 능력과 연결된다. 이는 다른 사람의 개인위생에 간섭하거나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이 감염의 근원이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의 삶에 위협이 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7월까지 광주에 머무르다가 건강이 안 좋아져서 우리에게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백신 개발 뉴스들을 좇고 있다. 아버지는 일부 보도에 고무되기도 했지만, 많은 강대국이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백신을 구매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백신이 개발되더라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주사를 맞을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가난, 차별, 실망, 좌절을 딛고 살아온 아버지의 세월이 그런 말을 하게 만든 것이다. 아버지는 평생 '우리 같은 서민들'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배제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경험한 분이다.
나는 최근 이탈리아 롬바르디 지역 사람들이 공공 의료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유족들은 '건강은 권리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었고, 얼굴에는 분노가 역력했다.
건강은 개인의 책임만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건강은 강력한 국가 보건관리 시스템을 통해 보장돼야 하는 사회적 선이다. 더는 '우리 공동체의 건강이 구성원 개개인의 건강에 달려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납득시킬 필요가 없기를 바란다.
편혜영은 소설가다. 작품으로는 『선의 법칙』, 『재와 빨강』, 『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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