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김윤경의 촉] 정재찬 한양대 교수 인터뷰. 2021.1.8/뉴스1 © News1 권현진 기자

(서울=뉴스1) 김윤경 기자 = 허(虛)를 찔리면서 온다. 관성으로 살다가 투덕투덕 나이 먹었음을 인지하게 되는 어느 한순간은. 자각이 찾아오는 순간은 그러하다. 그리 되어 눈 앞이 아찔할 때 비로소 시(詩)도 보인다.
드문드문이라도 먼저 시를 읽는다면 깨달음이 꼭 벼락같이 오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느닷없진 않을 텐데. 그러나 시의 세계로 건너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더 직감적이고 더 팬시하며 더 쉬운 위로를 사는 사람들이 많다. '소확행'이란 말을 쓰면서 감정을 소비로 달래려고들 한다. 취(取)하면 생각보다 많은 걸 내어주는 것이 시라고도 하는데.

이런 우리에게 끊임없이 '시 처방전'을 써주고 있는 정재찬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찾았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 이어 <그대를 듣는다>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같은 베스트셀러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신종 감염병에 더욱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진정한 위로인가, 시는 과연 그런 효능을 갖고 있나 확인하고 싶었다.


◇무작정 인생에 덤비는 게 아닌 시심(詩心)으로 '소명' 되찾는 연습

길고도 깊은 얘기로 정재찬 교수는 시가 인생의 '치료약'일 뿐 아니라 '예방약'임을 강조했다. 시는 우리를 비집고 나오는 각종 상실감과 고통, 지겨움에 대한 대증 처방이기도 하고 이런 감정들이 우리를 찾아올 때 덜 흔들릴 수 있도록 하는 백신을 놓는 것이기도 하단 얘기. 그렇게 마음을 달래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무작정 인생에 덤비며 열패감만 느낄 게 아니라 길이 있는 곳에서 뜻을,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되찾는 연습도 해볼 걸 권유했다. 연구실을 나올 때쯤 시심(詩心)이란 그렇게 삶을 살뜰하게 살아가게도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서울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김윤경의 촉] 정재찬 한양대 교수 인터뷰. 2021.1.8/뉴스1 © News1 권현진 기자

다음은 정재찬 교수와의 일문일답.
-시가 처음 자신을 찾아온 것은 언제였나.

▶ 문청(문학청년)이었던 시절도 없었고 문학에도 관심이 없었다.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다 대학을 들어갈 때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되며 최초로 좌절했다. 1980년대 초 대학이라는 곳도 우울했고 아버지도 공직에서 갑자기 물러나시게 돼 집안도 우울했고 나도 우울했다. 사대에 진학했는데 2학년이 되니 전공을 정하라고 하더라. 우울하다고 놀았더니 원하는 전공을 할 수가 없더라. 국어교육학을 택한 건 '차악'이었을 정도로 문학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가 시인이자 국어국문학과 교수였던 정한모 교수의 시론 과목을 듣겠다고 선택했다. 교수님께서 첫 시간에 시인 명단을 주시더니 그중 한 사람을 골라 시인론을 쓰라고 하셨다. 시를 모르는데 뭘 어떻게 하나 싶어 고민하던 차에 미학과에 다니던 한 선배로부터 "그럼 김수영론을 써 봐"란 말을 들었다. 김수영이 누군지도 제대로 몰랐고 당시 김수영을 얘기하면 불온한 세력으로 분류되기도 했기 때문에 꺼렸다. 그러나 그 선배에게 받은 김수영 전집을 읽어보고 너무 놀랐다. '시가 이럴 수도 있구나' 하고. 그래서 이 시에 대한 평을 찾아보니 이번엔 '평론이 이런 것일 수 있구나'란 깨달음이 왔다. 엄청나게 김수영에 매달려 원고지 100매가 넘는 리포트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걸 발표했더니 교수님께서 김수영의 다른 시를 주면서 해석해 보라고 하시는 거다. 그게 '공자의 생활난'이란 초기 작품이었다. 신명이 나 설명을 했더니 교수님께서 "음, 정 군은 시를 아는구만"이라고 하시더라. 그게 시가 내게 온 첫 번째 순간이었다.

그리고 민족시 낭송회라는 모임에서 200여명의 학생을 앞에 두고 시낭송을 했다. 그때 학생들이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 중에서)"라고 외치는 나에게 숨죽이고 집중하다가 낭송이 끝나자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어, 시 낭송은 이런 힘도 있는 걸까' 하면서도 여전히 문학이 확 들어오진 않았다. 그러다 학문으로서의 문학을 해보자란 결심을 했다. 팬심으로 배우던 김윤식 교수님의 뒤를 잇고자 했다. 그분이 하신 카프(KAPF·조선프롤레리아예술가동맹) 연구 중에 시가 없었다, 그리고 모더니즘을 제대로 알려면 그걸 연구해야 한다 생각해 석사 논문에 도전했다. 그때만 해도 카프 연구는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해금이 되지 않았으니. 그래도 열정을 가지고 임했고 역시나 교수님들이 저의 논문을 사상적으로만 보는 까닭에 아주 어렵게 통과가 됐다. 이후 박사 과정 진학도 여러 이유로 쉽지 않았고 일단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사회에 진출하게 됐다.

◇뒤늦게 찾아온 시와의 첫사랑…좌절 느끼며 '문학 교육'의 삶으로

-고교 국어 선생님 시절로 이어졌고 교수까지 하시니 시를 가르치는 일로 이렇게까지 오는 것이 당연하기도 한 것 같다.

▶ 그때로만 보면 아니었다. 당시엔 어떻게든 박사 과정에 들어가야지란 생각뿐이었거든. 게다가 4년여 가르친 게 어학, 문법이었다. 그러면서 국문과 대학원 박사 과정 진학이 맘대로 안 됐다. 좌절을 또다시 느꼈고 병까지 왔다. 그래도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과정이 다 내가 이렇게 올 수 있는 거름이 됐던 것 같다. 문학만 한 것이 아니라 '문학 교육'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게 내 삶의 모티브가 되었으니까. 문학과 교육 사이를 오가는 인생이 된 것이 오히려 감사하다.

-그래도 시를 소개하고 시와 인생을 얘기하는 책을 펴내기까지는 또 다른 결심이 필요했을 것 같다.

▶ 방향을 돌려 국어교육과에서 박사를 따고 교수가 됐다. 제자들을 배출하고 이런 걸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 미국으로 교환교수를 가면서 시와 제대로 다시 만나는 기회가 생겼다. 시로 에세이를 쓰겠다는 막연한 마음이었는데 가지고 간 책들이 거의 없었다. 오로지 내가 저장해 간 시 파일, 노트북뿐이었다. 학문으로서의 시만 했던 내가 시를 다시, 완전히 새롭게 읽게 된 계기였다. 내가 접했던 민중시 말고 1980년대에서부터 2000년대까지를 훑으며 정말 좋은 시들이 많았던 걸 알게 됐다. 이성복 시인의 작품도 뒤늦게 발견하는 식이었다.

-그때 쓰신 원고라면 일찌감치 발간됐어야 하는데.

▶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는데 서문을 안 넘겼다. 이 책을 내도 될까란 회의감이 찾아왔다. 나는 그동안 썼던 원고를 토대로 처음엔 공대생들을 대상으로 시 강의를 했다. 그러면서 나처럼 시를 가지고 자신의 경험과 문화적 콘텐츠를 써보란 과제를 냈다. 학생들이 곧잘 하더라. 세대가 달라도 레퍼토리가 같더라.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문화적 기억의 세대간 전수라고 한다면 그게 됐던 것이다. 강의는 점점 대상을 넓혀갔다. 그러다 6년이 지나 어느 폭설이 내린 아침에 느낌이 와 얼른 서문을 써서 넘겼는데 출판사 측에서 "너무 늦었다"는 답변을 해 왔다. 그래서 출판사를 바꿔 낸 책이 첫 책 <시를 잊은 그대에게>다. 책에도 팔자가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했었을 때여서 반응이 좋았던 것 같다.

서울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김윤경의 촉] 정재찬 한양대 교수 인터뷰. 2021.1.8/뉴스1 © News1 권현진 기자

-평범한 사람들에게 시가 가까이 오게 되는 건 쉽지 않다. '위로 팔이'식으로 편집된 가벼운 책들도 많아서 시와 경쟁한다.

◇'위로 팔이' 넘치는 현상 안타까워…시는 전유(appopriation)하는 것

▶ "그래, 너 이해해" "네가 옳아" 이런 것들은 상대를 대하는 태도이자 전제이지 결론은 아니다. 물론 그런 가르침도 유효하고 소중하다. 그러나 받아들일 때 뼈아픈 결론은 뒷전으로 넘기고 듣기 좋은 말만 취하게 되는 현상이 안타깝다. 값싼 위로와 손쉬운 자기 합리화가 넘쳐나는 것이다. 시는 유리창과도 같다. 바깥의 풍경이 다 보이지만 자신이 직접 밀고 나가야하는 몫이 있다.
시는 전유(appopriation)하는 게 중요하다. 자기 것으로 삼는 것 말이다. 전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 아마 인공지능(AI)이 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는 도처에 있다. 그걸 적극적으로 발견해야 한다. 작가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의도를 시를 읽는 사람과 매칭해 주면 거기서 불꽃이 인다. 상품을 죽 나열해 놓고 소비자들이 알아서 찾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리스트'가 나서서 만나게 해주면 스타일을 찾을 수 있듯이. 내가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어른이어서 이 역할을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가르치신 '필유곡절'(必有曲折)의 자세로 세상을 대하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

◇직업은 체면, 품위 지킬 때 숭고…'감사'라는 형태의 합리화 필요

-시로 읽는 인생론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엔 젊은 세대보다는 40,50대가 많다고 하던데,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

▶ 책에도 썼지만 응급실에서 일하는 한 교수는 베드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만나면 이마에 깊게, 푹 손을 얹는다고 한다. 그러면 아파서 힘겨워했던 이들, 뒤늦게 나타난 의사에게 억하심정을 갖고 있던 이들도 온순해진다고 한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도 그런 의사가 나온다. 정부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는데 의사들은 목숨을 걸고 페스트와 싸운다. 기자가 의사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묻자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그건 단지 성실성의 문제"라고 답한다. 성실성이라 번역된 말을 원어로 찾아봤더니 상식, 체면이란 말과 더 가깝더라. 영어로 하면 커먼 디선시(common decency), 즉 상식적인 체면, 품위, 나아가 자존심.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라는 거다. 각자의 일, 직업은 그렇게 임할 때 숭고해진다. 밥만 번다고 생각하면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도 그렇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서도 괴롭다.

그리고 삶을 너무 'y=f(x)'란 방정식으로만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노력한 만큼 되는 삶만 계속되면 y값만 커지고 교만이 올 수도 있다. 그게 조심해야 할 타임이다. y값이 여러 이유로 꺾이면 나, 그러니까 x가 잘 하면 된다고 자신을 몰아붙이는데 그러지 말고 주어진 y값을 인정해 봐라. 그러면서 좌표를 찾아가면 된다. 눈높이를 조정할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인생을 합리화도 해 봐라. 나쁜 의미에서의 '정신승리' 말고 '감사'라는 형태로 오면 더 좋을 것 같다.

-20대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 20대에게 가장 미안하다. 나는 그 애들을 가르치고 있으니까. 정말 열심히 살고 있는 건 맞는데 그 내용을 보면 취직하려는 거라 안타깝다. 그리고 취직하면 젊은이들은 밥벌이와 자신의 삶을 너무 분리하려고 생각한다고들 지적하는데 오히려 우리가 반성해야 한다. 일의 노예로만 살았던 걸, 일에서만 가치를 찾으라고 강요하고 나무라는 건 건강하지 않은 생각이다.

- 코로나 시대를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모두에게 '시 처방'을 해 준다면

▶ 손택수 시인의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를 권한다.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

모래밭 위에 무수한 화살표들,
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
끝없이 뒤쪽을 향하여 있다

저물어가는 해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드센 바람 속을
뒷걸음질치며 나아가는 힘, 저 힘으로

새들은 날개를 펴는가

제 몸의 시윗줄을 끌어당겨
가뜬히 지상으로 떠오르는가

따라가던 물새 발자국
끊어진 곳 쯤에서 우둑하니 파도에 잠긴다

-권하신 이유는.

▶ 물새 발자국에서 시상을 얻은, 위트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살아왔던 힘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비로소 비상을 하는 존재들일지 모른다. 내가 활이 되어 잔뜩 구부려야만 내가 다시 화살이 되어 비행을 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를 날게 하고, 나를 쏘아 올리는 건 나밖에 할 수가 없으니까. 새들의 비상을 억압하는 기압이 날개를 떠받쳐 새들을 날게 해 주는 힘이 되는 것처럼 당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세상사 압박을 억울해하지만은 마시길.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것 같은가.

▶ 나는 나 만의 시 해석이란 일을 기쁘게 한다. 성실함보다는 책임감으로 하지만. 수준과 범위의 양면에서 대중성과 전문성의 줄타기를 한다. 오래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언젠가는 시에서 조금 떠날지도 모르겠다. 시를 잊은 그대가 별로 남아있지 않아서. 그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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