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초강력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의 국가부도(채무불이행·디폴트) 여부가 4일 결정된다.
러시아는 일단 국가부도를 피하려고 자국 내 달러를 끌어모아 미국·영국 등 서방국의 해외결제기관에 국채 이자를 송금한 상태다. 하지만 이들이 채권자들에게 이자를 전달할지가 관건이다. 이자 지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디폴트에 해당한다. 미국이 러시아 국가부도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3일(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AFP통신·로이터통신 등 외신을 종합하면 러시아 재무부는 지난달 29일 미국 씨티은행 런던지점에 달러화 국채 2건에 대한 이자와 원금 등을 입금했다고 밝혔다. 상환 금액은 2022년 만기 달러화 국채 이자와 원금과 2042년 만기 달러화 국채 이자 등 약 6억5000만달러(8200억원)다.
이는 러시아가 달러화 이자를 갚지 못해 디폴트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본 전문가들의 예상을 깬 것이다. 시장에선 세계 최초 사회주의 연방국가를 수립한 러시아(소비에트 연방)가 104년 만에 처음으로 대외 채무를 갚지 못하는 위기에 빠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서방의 경제제재로 러시아의 외환보유액 6430억달러(815조원) 가운데 해외 은행에 예치한 4000억달러(507조원)가 동결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 주요 은행들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퇴출돼 국제 금융거래가 중단되는 등 자금 경색이 심각하다. 러시아가 달러화 대신 루블화로 국채 이자와 원금을 갚겠다고 주장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신용부도스와프(CDS) 시장을 감독하는 신용파생상품결정위원회(CDDC)는 "달러 표시 채권에 대한 루블화 상환이 명백한 계약 위반이며 채무불이행에 해당한다"고 판정했다. 루블화로 채무를 변제하겠다던 러시아 재무부가 자국 내 달러 보유고를 털어 부채 상환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루블화는 국제거래에 널리 쓰이는 기축통화가 아니어서 가치가 불안정하고 사용에도 제한이 많다는 것 채권자들이 루블화 결제를 용납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앞서 미 재무부는 "미국 은행을 통한 러시아의 달러화 표시 국채 상환을 허용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다. 러시아 재무부가 지난달에도 결제를 시도했지만 담당 금융기관인 미 투자은행 JP모건이 송금 처리를 거부하며 이체 시한을 넘긴 것도 미 재무부의 '불허' 지침 때문이었다. 이번 씨티은행 런던지점은 영국 금융기관이지만 미국의 입김이 여전히 통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미국과 함께 대러시아 제재에 가장 적극적인 국가인 만큼 채권자들의 이자 수령을 막을 수도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만약 이번에 러시아가 국가부도 사태를 맞으면 국제시장에서 러시아 국채는 사실상 휴지 조각이 돼 이를 보유한 채권자들이 큰 피해를 본다. 현재 러시아 정부와 금융기관, 공기업 등이 발행한 달러·유로 등 외화 표시 채권은 총 1500억달러(약 19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채권 잔액은 396억달러(50조원)로 이 가운데 절반을 해외 금융기관이 갖고 있다. 이는 이번에 부도 위기를 넘기더라도 똑같은 어려움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가부도 위기를 자초한 데 대해 러시아 대통령실 크렘린궁 내부와 국영기업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크렘린궁 관계자는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를 수십 년 전으로 후퇴시킬 치명적인 실수이자 오판"이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쟁을 부추기는 극소수 강경파에 휩싸여 경제·사회 피해를 우려하는 관료들의 조언은 듣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국영기업 한 관계자는 "푸틴 대통령과 측근들이 서방 주요국의 전방위 제재 속도와 강도에 매우 놀란 분위기"라며 "이번 전쟁 때문에 푸틴 집권 20년간 이룬 경제적 성장이 모두 파괴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