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클립아트코리아

원/달러 환율이 1450원을 넘어 1500원선을 위협하며 시장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그러나 과거 환율 급등기마다 '흑자도산'을 걱정하며 사투를 벌였던 국내 은행들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하다. 2026년 한국 금융권은 환율이라는 파도를 막아서는 대신 그 파고를 이용해 배의 수평을 잡는 등 진화된 방식으로 리스크를 관리하고 있다.

과거에서 배운다… 고환율 사투에서 방어로

과거 고환율은 곧 파산 공포였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국내 은행들은 기업들의 외화 단기 차입을 중개하다 외화가 바닥나는 유동성 쇼크를 맞았다. 은행권은 유동성과 건전성 모두 충격을 받았고, 이후 다수 금융기관이 퇴출·합병되거나 공적자금 투입을 받아야만 하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겪었다. 당시의 전략은 오직 살기 위한 외화 확보뿐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또 다른 시험대였다. 세계적인 투자은행(IB) '리먼 브라더스'가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하며 그해 초 9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은 1500원대까지 치솟았다.


다만 과거 학습 효과는 남아 있었다. 한국은행과 정부 중심으로 달러 유동성 라인을 확충하며 방어막을 세웠고, 외화 유동성 관리 체계도 한층 정교해졌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가 생존을 위한 '사투'였다면 2008년은 시스템 차원의 '방어'로의 전환이었다.
그래픽=시대 강지호 기자

이제 환율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관리 가능한 변수의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평가다. 현재 은행권에서는 1450원을 단순한 고점이 아닌 '1차 체력 테스트 구간'으로 정의한다. 내부 리스크 관리 매뉴얼상 이 구간은 환율의 방향성보다 유동성의 쏠림과 경색 지점을 본격 점검하는 구간이라는 설명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최근 원/달러 환율은 달러 강세 흐름 속에서 상방 압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1420원대 초반에서는 수출 네고 물량과 당국 경계 심리가 맞물리며 단기적으로 속도를 조절하는 모습도 나타난다"며 "시장은 1450원 선을 1차 상단 인식 구간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1500원이라는 숫자를 대하는 태도다. 과거 1500원이 위기의 상징이었다면 지금은 시스템 차원에서 흡수 가능한 '통제된 리스크' 수준이라는 설명이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은행들은 환율을 한 가지 숫자로 보지 않고 1300원대, 1400원대, 1500원대 구간별로 대응 시나리오를 따로 돌린다"며 "단기 급등락이 반복돼도 1500원선까지는 시스템 차원에서 흡수할 수 있는 범위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환율 변동의 성격 자체가 변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환율 1500원 돌파'에 대해 위기 징후를 알려주는 신호가 아니라 글로벌 달러 강세, 국내 거주자의 해외 투자 급증에 따라 나타나는 구조적 수급 불균형의 결과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이번 환율 급등은 외화 유출 요인이 늘어난 것이 한몫을 했다"며 "해외 증권 투자가 많아졌고, 경상수지에서 돈을 번 것보다 많은 부분을 해외에 투자하고 있어 원/달러 환율이 치솟았다고 해서 외환위기를 말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선을 그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 자체가 부족해 환율이 튀었다면 지금은 미국과의 금리 차와 글로벌 통화 질서 재편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 세계적인 '강달러' 현상의 결과물이라는 분석이다. 한국은 이제 빚보다 받을 돈이 많은 대외금융 순자산국으로도 변모했다. 2024년 말 기준 순대외금융자산은 1조달러를 돌파하며 외환 안전판을 갖추게 됐다는 시각이다.

공포의 시대는 끝… 환율, '리듬'을 관리하는 단계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를 정리하고 있다./사진=뉴시스

금융권은 환율의 절대 수치에 일희일비하기보다 변동성 확대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심리적 쏠림과 유동성 흐름을 관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24년 '12·3 비상계엄' 사태를 거치며 환율 변동성이 커질 때 우리 금융권은 무엇이 먼저 흔들리고 또 어떤 지표가 먼저 경고를 보내는지 체감했다. 당시의 경험은 우리 금융권이 '고환율의 뉴노멀화'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리스크 관리에 필요한 예방주사가 됐다.

은행들의 실무 전략도 이에 맞춰 움직인다. 외화 조달 단계에서는 만기를 보수적으로 분산해 롤오버(만기연장) 리스크를 낮추고, 시장 경색 가능성에 대비해 외화 유동성 버퍼(Buffer)를 두텁게 쌓는다. 이 같은 흐름은 외화예금 정책에서도 드러난다. 주요 시중은행들은 달러예금 금리를 연 0%대 수준으로 낮췄다. 이자를 거의 주지 않는 수준으로 금리가 내려가면 개인과 기업 입장에서는 예금 형태로 달러를 쌓아둘 유인이 줄어든다. 달러예금이 과도하게 증가할 경우 환율 불안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에다 과열 마케팅을 자제해달라는 당국의 주문이 맞물려서 나온 조치다.

은행권은 외화 유동성 방어막이 과거보다 두터워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대표 지표인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은 당국이 설정한 최소 기준을 크게 웃도는 수준에서 관리되고 있다. 외화 유동성 관리 체계가 촘촘해질수록 고환율 국면에서의 대응은 외화를 끌어모아 버티는 방식에서 유동성의 리듬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원화 약세 흐름이 장기화될 경우 은행의 방어력은 유동성뿐 아니라 자본건전성에서도 시험대에 오른다. 환율 상승은 외화자산의 원화 환산액을 키워 위험가중자산(RWA)을 늘리고, 결과적으로 보통주자본비율(CET1)에 하락 압력으로 작용한다. 금융당국은 CET1비율의 마지노선을 13%로 잡고 있는데, 업계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100원 오를 경우 CET1비율이 산술적으로 최대 0.3%포인트 하락할 수 있다고 본다.

실제 2024년 '12·3 비상계엄 사태'로 환율이 급등했을 당시 주요 금융지주의 CET1비율은 즉각 반응했다. KB금융의 CET1비율은 2024년 9월 말 13.85%였지만 12월 말 13.51%로 0.34%포인트 하락했고, 같은 기간 신한금융 역시 13.13%에서 13.03%로 0.10%포인트 내려갔다. 하나금융도 13.17%에서 13.13%로 한 분기 만에 0.04%포인트 하락했다.

다만 지난해 3분기 기준 주요 금융지주의 CET1비율은 KB금융 13.83%, 신한금융 13.56%, 하나금융 13.30%, 우리금융 12.92% 등으로 양호한 수준을 유지했다. 고환율이 곧바로 시스템 리스크로 번질 가능성은 과거보다 낮아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2026년 고환율 국면은 환율 수준 그 자체보다 변동성 속에서 금융 시스템이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단계에 가깝다. 1997년 외환위기 시절의 은행이 외화를 끌어모으며 생존을 고민했다면, 지금의 은행은 환율의 파고 속에서 유동성과 자본을 조율하며 관리 가능한 리스크로 대응하고 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은행들이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거치며 일종의 체력 단련을 한 셈"이라며 "환율이 단기적으로 급등하더라도 유동성과 자본의 충격 흡수력이 과거보다 개선된 만큼 위기 국면을 단순 공포가 아닌 관리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확산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