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돋아나는 새순처럼 3월의 시작은 유독 뜨거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거리마다 휘날리는 태극기의 물결 속에서 1919년 전국을 뒤덮었던 함성과 이름 없이 스러져간 이들의 용기를 떠올리다 보면 평범한 여행지의 풍경은 더욱 소중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한국관광공사가 3·1절을 맞아 독립운동의 정신과 역사의 숨결을 되새길 수 있는 여행지 4곳을 소개했다.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3·1운동 당시 일제의 탄압에 의해 발생한 비극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다. 마을 이장이었던 안종후의 주도로 설립된 제암리교회는 단순한 종교 시설을 넘어 마을의 강한 단결력을 상징하는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1919년 4월15일 오후 일본 경찰은 제암리교회에 신자들을 모이게 한 후 문을 폐쇄하고 교회에 불을 지르면서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열흘 전 일어났던 만세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무자비한 보복의 아픔은 숭고한 추모의 공간으로 변했다. 현장에 세워진 순국기념탑과 일본 기독교인과 사회단체들이 속죄의 뜻을 담아 보내온 성금으로 재건된 교회는 비극을 넘어선 화해와 기억의 가치를 보여준다. 대대적인 유해 발굴을 거쳐 교회 옆 묘소에 잠든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며 걷는 길은 화려한 봄나들이보다 훨씬 깊은 울림을 준다.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
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의 자취가 깃든 곳으로 열사의 생가와 독립의 의지를 알렸던 봉화터가 자리한다. 이화학당 재학 중 서울 시위에 참가한 열사는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아우내 장날의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순국하는 비극을 겪었고 열사 또한 모진 고문 끝에 1920년 9월 옥중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천안시는 1972년에 사당을 세우고 열사의 영정을 모셨다. 매년 3월의 마지막 날이면 봉화를 올리며 애국정신을 오롯이 기리고 있다. 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함께 방문해 뜨거웠던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가슴 깊이 새겨보는 것도 좋다.
대구 3·1만세운동길
동산의료원 옆 제일교회와 선교사 주택 사이로 난 90여 개의 계단은 3·1운동 당시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학생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도심으로 모이기 위해 통과했던 역사의 통로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 탓에 대구의 만세운동은 서울보다 조금 늦은 1919년 3월8일 오후 학생과 교회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계단 양옆으로 늘어선 태극기와 당시의 긴박한 모습을 담은 사진에는 서슬 퍼런 항일 정신이 묻어난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담쟁이넝쿨로 뒤덮인 청라언덕과 과거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던 주택들이 나타난다. 현재 교육 역사박물관으로 운영 중인 블레어 주택에서는 당시의 시대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내부에 마련된 근대 교육과 3·1운동 관련 전시물을 살피다 보면 민족의 아픈 발자취와 107년의 세월을 넘어선 용기를 되새길 수 있다.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 운동이 시작된 군산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영명학교와 구암교회 등을 주축으로 일어난 3·5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만세의 물결을 전파하는 도화선이 됐다. 100여 년 전 영명학교의 모습을 재현한 기념관의 외형에서는 당시의 고즈넉한 정취가 묻어난다.
내부에는 유관순 열사와 손병희 선생의 모습이 부조 형태로 전시돼 있어 이들의 숭고한 용기를 오롯이 되새길 수 있다. 정교한 디오라마 형태로 전시된 3·5 만세운동의 전개 과정은 당시 민중들이 가졌던 독립의 열망을 짐작하게 한다. 영명학교 교사였던 문용기 선생이 흘린 피가 붉게 배어 있는 옷을 비롯해 독립군이 사용했던 총기류 등 60여 점의 유물은 그날의 긴박했던 상황을 생생히 증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