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정이 사상 첫 800조원대로 논의 중인 내년도 예산안은 '적극적 재정'과 '씀씀이 정리'라는 키워드로 요약된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초과세수를 지방과 청년, 성장동력에 몰아넣는 동시에 50조원 규모의 지출 구조조정으로 재정의 부담을 덜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정부의 확장 재정과 한국은행의 통화긴축 정책이 각각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는 '엇박자'라는 지적도 나온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25일 국회에서 열린 '내년도 예산안 당정협의' 모두발언에서 "반도체 호황에 따른 증대된 세수를 일시적 지출로 소진하지 않기 위해 미래대응기금을 신설하고 잠재 성장률 반등을 뒷받침하는 전략적 투자 플랫폼이자 세수 변동성을 완화하는 재정 안정화 장치로 활용하겠다"면서도 "대규모 세수에도 불구하고 고강도 지출 구조조정을 병행해 효율적 재정 운용을 도모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호황에 따른 초과세수를 일시적 지출로 소진하지 않고 미래대응기금으로 활용하는 방안에는 대체로 공감했다. 국가의 성장동력이 한계에 직면한 시기에 미래 연구개발(R&D)과 지방주도성장은 물론 ▲반도체 ▲피지컬 AI(인공지능) ▲AI 데이터센터 등 3대 메가프로젝트에 예산을 투입할 필요성도 인정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이날 [시대]와의 통화에서 "우리나라 세수는 반도체와 같은 특정 산업의 경기 변동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호황 때 걷힌 세수를 당해 연도에 모두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정부가 호황기에 초과세수를 적립해 불황기에 활용하는 재정 완충장치를 만드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초과세수를 별도로 적립해 놓으면 세수 결손이 발생했을 때 급격한 증세나 추가적인 국채 발행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초과세수의 활용처로 ▲국가채무 상환 ▲AI·반도체·바이오·방산 등 미래 성장산업의 R&D와 인프라 ▲청년과 미래세대의 교육·인재 양성을 꼽았다. 그러면서 "기금의 적립·사용 기준을 법률로 명확히 하고 국회의 통제를 받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출 증가율 10%대…금융위기 후 처음

하지만 나랏돈을 불리는 속도가 가파르다는 지적도 있다. 박 장관은 지난달 13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내년도 총지출 증가율을 올해 본예산(727조9000억원) 대비 '10% 이상'으로 제시했다. 내년도 국세수입이 당초 전망치인 약 421조원을 넘어 사상 최대인 '500조원+α'에 달할 것이란 전망에서다. 연간 총지출 증가율이 두 자릿수를 기록하는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10.9%) 이후 처음이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통화에서 "예산 증가율은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에 맞추는 게 일반적"이라며 "2~3%대로 증가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반도체 산업이 지금과 같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늘어난 예산이 내년에는 없을 수 있다"며 "예산을 한번 늘렸을 땐 다시 줄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예산을 확 늘리는 것은 일종의 포퓰리즘에 가깝다. 예산은 보수적으로 짜야 한다"고도 했다.
홍 교수는 국가채무 상환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초과세수가 나타나면 부채를 갚도록 돼 있다"며 "국가채무 때문에 발생하는 이자가 30조원을 넘었고 2029년에는 50조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부채를 갚아야 미래에 예산을 안정적으로 끌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미래대응기금에 대해서도 "'미래'라는 단어가 너무 포괄적이어서 정부가 입맛대로 부담 없이 활용하려는 것 아닌가"라며 "차라리 부채를 갚는 게 낫다"고 했다.
금리는 죄고 재정은 풀고…악순환 우려

당정이 이날 협의에서 예산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점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원칙적으로 예산안의 일부 내용은 공개하는 게 좋다"며 "예산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미리 알려주고 여론을 들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이번에 다루고 있는 것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예산안"이라고 말했다.
확장 재정이 한은의 긴축 기조와 어긋난다는 우려도 있다. 한은은 지난달 16일 금융통화위원 7명의 전원 일치로 기준금리를 연 2.50%에서 2.75%로 올렸다. 시중에 풀린 돈을 거둬들여 물가를 안정시키겠다는 조치다. 반면 정부가 예산 지출을 늘리면 시중에 돈이 풀리면서 물가를 자극하게 된다. 정부가 돈을 풀면 한은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더 올려야 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시대와의 통화에서 "한국은행이 통화긴축 정책을 펴는 상황에서 확장 재정은 엇박자"라며 "한쪽은 틀어막고 한쪽은 뚫어놓으면 하나 마나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다만 신현송 한은 총재는 지난달 기준금리 인상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재정정책이 경제 전반의 성장 여력을 높이는 투자로 이어진다면 반드시 통화정책과 엇박자가 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초과세수를 자원개발에 투자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허정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세수에 여력이 있을 때 핵심광물 공급망 확보 등 평소 부족했던 부분에 투자해야 한다"며 "광산 지분이나 채굴권 확보에 나서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재정 상황이 나빠지면 부채를 갚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여유로울 때 빚을 갚을 필요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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