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잰걸음으로 국회 소통관을 빠져나갔다. 기자 20여명이 기다리고 있던 현장이었다. 대표직 사퇴 계기를 묻는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이 대표는 평소 국회에서 마주친 취재진의 질문에 곧바로 답하고 매주 최고위원회의 내용을 직접 설명해 온 인물이다.
이 대표는 26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방선거 이후 석 달 남짓 당의 자강과 쇄신을 위한 고민과 제안을 해왔지만 당 안에서 충분한 호응을 얻지 못했다. 전적으로 제 책임"이라며 대표직을 내려놨다. 지난해 7월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재선출된 지 1년1개월 만이다.
사퇴 배경으로 6·3 지방선거 참패가 꼽힌다. 개혁신당은 후보 192명 가운데 경기 화성시의원 1명을 당선시키는 데 그쳤다. '정이한 피습 자작극' 사건 직후에는 이 대표와 공천관리위원장이었던 천하람 원내대표의 책임론까지 불거지면서 당내 갈등이 시작됐다.
이 대표는 참패 이후 '뉴미디어 중심의 홍보 전략'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당의 정체성을 다지고 인지도를 높여 2028년 총선에 대비한다는 쇄신안이었다. 이 대표가 지난 6월 중순 홍보 관련 지시를 내렸지만 당 사무를 맡은 인사들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게 복수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 대표는 지난 24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쇄신안에 호응이 없다면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천 원내대표가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 예방까지 마친 뒤 사퇴하라고 했고 이 대표는 당의 리더십 권위가 흔들릴 수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예방 일정은 결국 취소됐다.
창당 초기에는 이 대표가 방향을 제시하면 당직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만 지방선거 참패 뒤 그런 의욕이 사라졌다고 한다. 2028년 총선을 염두에 둔 인사들은 당의 정체성 강화보다 개인 인지도 확대와 이미지 관리 등에 집중하며 이 대표와 갈등을 빚었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 대표는 지선 전후 2030·3040세대가 주로 분포해 있는 '경기 남부벨트'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당내 이견에 부딪혔다고 한다.
제3지대 조직력 부족, AI로 극복 시도했지만 결국…

이 대표는 돈과 조직이 부족한 제3지대 정당의 한계를 AI(인공지능) 등 기술로 돌파하려 했다. 지방선거를 99일 앞둔 지난 2월24일 후보의 정책 개발을 돕는 'AI 정책 플랫폼'을 내놨다. 지난 3월9일에는 LLM(거대언어모델)과 GPS(글로벌위성항법체계)를 결합해 정치 신인의 선거 동선과 일정을 짜주는 AI를 선보였다. AI 기반 ARS 여론조사 시스템도 구축했다.
이 대표는 당시 "작은 정당이 거대 양당 사이에서 비교 우위를 점하는 방법은 그들이 하는 일을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해내고 그 위에 기술적인 새로움을 얹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 개혁은 이 대표가 오래 매달려 온 주제다. 2023년 3월 펴낸 책 '이준석의 거부할 수 없는 미래'에서 정치 개혁 방향으로 "공천을 받는 과정 자체가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했다. 경선 공개 토론, 공직후보자기초자격평가(PPAT) 같은 공천 검증 장치가 나온 배경이다. 밀실 공천에서 벗어나 실력과 소신이 있는 사람이 줄을 서지 않고도 정치권에 들어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뜻이었다.
정치 실험 실패…1보 후퇴 후 2보 전진할까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돈이 지배하는 정치를 끝내겠다"며 내놓은 '99만원 선거운동' 등이 기초의원 1석이라는 성적표로 돌아왔다. 이 대표의 정치 실험이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다만 이 대표가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향후 정치적 입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이 대표에게 닥친 역경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21년 6월 국민의힘 초대 당대표로 선출된 뒤 이듬해 대선과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해 7월 당 윤리위원회 징계로 당원권이 정지됐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권성동 원내대표에게 보낸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가 바뀌니 참 달라졌습니다"라는 문자가 공개된 시점이다. 당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바뀌며 이 대표는 대표직을 잃었다.
이 대표는 2023년 12월 국민의힘을 탈당했고 2024년 1월 개혁신당을 창당했다. 그해 4월 총선에서 경기 화성시을에 당선됐다. 3차례 낙선 끝에 이뤄진 원내 입성이었다. 지난해 6월 대선에서는 8.34%로 3위를 기록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태경 전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시대]와의 통화에서 "AI 시대에 적합한 정치인인 만큼 지방선거 결과 등을 차분히 살펴보면서 생각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지금처럼 보수혁신 어젠다를 꾸준히 밀고 가면서 지도자로서 역량을 쌓아가면 된다"고 했다.
한편 당내 구심점이었던 이 대표 사퇴 후 개혁신당과 국민의힘의 통합 가능성도 관심이다. 다만 이 대표는 그간 측근들에게 '강성 지지층' 중심의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 등 현 지도부 체제와는 노선이 다르다며 합당은 없다고 못 박았다고 한다. 장 대표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새롭게 정립될 보수의 가치에 동의하고 보수 정당의 역할을 함께 해왔던 세력과는 어떤 연대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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