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의 원자력 추진 컨테이너선 조감도. /사진=HD현대


국내 대형 조선사들이 원자력을 동력으로 하는 선박의 상용화에 속도를 내지만 정작 배를 사서 바다에 띄울 해운 선사들은 시큰둥한 반응이다. 조선소의 건조 기술 완성도와는 별개로 원자력 특성상 선주가 감당해야 할 법적·상업적 책임 등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어서다.

11일 조선·해운업계에 따르면 국내 조선업계는 차세대 글로벌 해상 원자력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국제해사기구(IMO)의 2050년 탄소중립(Net-Zero) 로드맵에 따라 사용 연료가 다양해졌고 최근엔 '원자력'이 궁극의 친환경 연료로 거론되고 있다. 과거 군함이나 쇄빙선 등 일부 특수선박 위주로 쓰이던 원자력이 민간 상선으로 확장되는 모양새다.



최근 조선업계에서 원자력 추진 상선에 대한 업계 관심이 높아진 건 중국과 미국 등 해외 주요국에서 소형 모듈 원자로(SMR) 또는 용융염 원자로(MSR)를 탑재한 원자력 추진 상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어서다. 원자력 추진선은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것은 물론 엔진 배기기관이나 대형 연료탱크가 필요 없어 화물 적재량을 대폭 늘릴 수 있다. 게다가 최대 20여년 동안 연료 보충 없이 운항할 수 있다.

미국은 조선산업과 에너지 안보를 지키기 위해 교통부 해사국(MARAD) 주도로 지난 5월 SMR 개발 이니셔티브를 출범했다. 이어 지난달 말엔 미국 워싱턴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주도로 해상 원자력 표준화를 논의하는 '아트라스(ATLAS) 이니셔티브'도 등장했다. 국제해사기구(IMO)도 2030년을 목표로 안전 협약(SOLAS VIII) 개정에 착수했다. 중국은 이미 2024년 국영 중국조선공사(CSSC) 산하 장난조선(江南造船)을 통해 토륨을 원료로 하는 MSR 방식 컨테이너선 계획을 발표했다. 2만4000TEU급 대형 선박이다.

국내업계도 기술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과 함께 17만4000㎥급 MSR 추진 LNG운반선에 대해 미국 선급(ABS)과 라이베리아 기국으로부터 세계 최초로 개념설계 인증(AiP)을 획득했다. 지난 7월에는 미국 원전 엔지니어링 기업 사전트 앤 런디(S&L)와 부유식 소형모듈 원자력발전(FSMR) 표준 플랫폼 공동 개발에도 착수했다.



HD한국조선해양은 1만5000TEU급 SMR 추진 컨테이너선 설계를 개발해 미국선급(ABS)의 기본승인을 확보했으며 2030년까지 설계 완성이 목표다. HD현대중공업은 이달 울산조선소 내 SMR 주기기 전용 생산 공장 설립에 2386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고 2029년 완공을 목표로 제조 기반 구축에 돌입했다.

하지만 발주처인 해운 선사들은 이 시장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해운업계의 한 관계자는 "2050년 넷제로를 위해 메탄올, 암모니아, 수소와 함께 원자력도 검토 대상 중 하나지만 다른 친환경 에너지원에 비해 풀어야 할 제도적 제한이 너무 많다"며 "조선소가 배를 짓는 기술을 확보하는 것과 선사가 그 배를 실제로 사서 상업 운항에 투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해운업계는 '무한책임' 리스크를 가장 큰 위험요소로 봤다. 현행 해상법상 원자력 손해는 선박소유자의 일반적인 책임제한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현행 원자력손해배상법은 육상 원자로와 일정한 외국 원자력선에 대해서는 책임 한도 등 별도 체계를 두고 있지만 정작 우리 국적 원자력 추진선에 대한 책임 규정은 공백 상태다. 사고 발생 시 외국 선주는 법적 보호를 받는데 국적 선주는 자산 전체를 걸고 천문학적인 배상 책임을 홀로 떠안아야 하는 제도적 역차별에 노출된 셈이다.

이런 이유로 보험 시장의 문도 열리지 않았다. 전 세계 외항선 책임보험을 담당하는 국제선주상호보험(IG P&I)은 물론 코리아P&I 역시 핵연료나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손해를 약관상 '제외 위험'으로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기항지 항만에서 입항을 거절할 수도 있다. 유엔해양법협약(UNCLOS)상 공해와 영해 통과는 가능해도 내수와 항만 입항 허용은 연안국의 주권 사항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과거엔 벙커C유 등을 주 연료로 사용해왔기에 효율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며 "현재는 차세대 친환경 연료에 대해 대세로 기운 게 없다 보니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게 경쟁력이 될 수 있어서 원자력 추진선 기술도 미리 개발해놓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도 이런 흐름에 맞춰 관련 사업을 추진한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정부는 내년부터 2032년까지 SMR 선박 R&D사업을 추진한다"며 "원자력 선박 관련 국제 기준 개정을 논의하고 이에 부합하는 국내법 정비도 준비할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