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비행기는 서울로 바로 못 갑니다."
2004년 12월 8일 4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대통령 전세기가 파리 드골 공항을 이륙한지 25분쯤 지났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자기 기자간담회를 자청하더니 이라크 아르빌 자이툰 부대 방문 방침을 밝혔다. 깜짝 놀란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한 노 전 대통령은 기수를 쿠웨이트로 돌려 그 곳에서 수송기편으로 갈아탄 후 자이툰 부대를 찾았다. 작전명은 '동방계획'. 쿠웨이트와 이라크에도 아르빌 방문 사실을 사후 통보할 정도로 극비 보안속에 추진됐다. 노 전 대통령이 아르빌에 다녀오는 동안 필자를 포함한 동행 기자들은 쿠웨이트 무라바크 공항의 기내에서 외국 정보기관의 감청을 우려해 위성전화도 사용하지 못 한 채 7시간을 대기했다.
이라크 파병 문제는 노 전 대통령에게 고통스러운 결단을 요구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윤태영씨가 최근 펴낸 '노무현 평전'에는 당시 노 전 대통령이 2003년 임기 초부터 파병 문제로 얼마나 고심하고 번민했는가가 잘 드러나 있다. 윤씨는 파병 결정은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서로부터 이탈하는 결단이었다고 적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2008년 12월 봉하마을에서 측근들에게도 "(파병을) 단호하게 거절했을 때 어떤 외교적 후유증이 있을지 가늠이 안 되었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압박을 느꼈다는 말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현재 이재명 정부가 맞닥뜨린 상황도 23년 전과 꼭 닮았다. 이재명 정부도 미국의 거세지는 파병 압력을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과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릴 위험 사이에서 외교적 딜레마에 빠져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최근 호르무즈 해협 파병 가능성에 대해 "한반도 대비 태세에 큰 손상이 있지 않은 범위에서는 운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이란 전쟁이 끝나면 기뢰 제거 등을 지원하겠다는 당초 정부 입장에서 벗어나 전쟁 중 군사적 기여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당초 미온적이었던 정부의 파병 검토가 급물살을 타게 된 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잇따른 공개 압박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관세·안보 협상에 진척이 없고 북·미 대화 조율 등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가 필요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파병 시한을 11월까지로 명시했다는 보도까지 나올 정도로 압박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2003년에 비하면 파병의 명분은 약하고 위험도는 현저히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9·11테러라는 전대미문의 공격을 받은 데 대한 반격 차원이었다. 그래서 당시 영국 등 미국의 우방들도 적극 참전했다. 반면 이번 미국-이란 전쟁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이나 다국적군이 꾸려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영국, 프랑스 등 주요 동맹국도 트럼프 대통령의 참전 요청에 선뜻 응하지 않고 있다. 이번 전쟁은 이라크 전쟁과 달리 미국 의회에서 승인도 못 받았다. 더구나 파병 시 한국은 미·이란 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로 연루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란의 보복 가능성도 거론된다. 파병 검토 움직임에 이란은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 및 전쟁에 대한 참여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거여(巨與) 국회' 상황인데도 파병 동의안 통과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도 이 정부에게는 부담이다.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미· 이란전 개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범여권인 조국혁신당·진보당은 파병 불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내부 핵심 지지 기반부터 설득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대통령은 예전 노 전 대통령보다도 훨씬 더 난감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10년 유시민씨가 정리한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이런 말도 했다. "대한민국은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할 일이 많다. 경제적으로도 미국과 원만하게 지내야 한다. 마른 나뭇가지 부러뜨리듯이 할 수는 없다. 차근차근 변화를 이루어 나가면, 언젠가는 옳지 않은 전쟁에 대한 파병 요청을 거절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올 것이다." 2003년 이라크 파병 논란 이후 23년이 흘렀지만 노 전 대통령이 소망한 '파병 요청을 거절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아직 멀었다는 게 다시금 확인된다. 안타깝고 서글픈 현실이다.
2003년 9월 미국은 추가 파병을 요청하며 '전투병'으로 못 박고 최소 3000~5000명 규모의 경보병 전투여단을 갖춘 폴란드형 사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집요한 협상 끝에 '비전투병 3000명 이내'로 절충했고, 주둔지도 이라크에서 가장 안전한 북부 쿠르드 지역을 택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파병을 피할 수 없다면 동맹의 신뢰를 지키면서도 국익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최적의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다는 점을 미국측에 분명히 알리고 파병 시한도 한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연대하는 형식을 취해야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미국에 분명하게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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