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흰 개 한 마리가 인조 잔디 위를 내달린다. 포도알처럼 까만 눈망울엔 구김살이 없다. 낯선 카메라를 향해 목청껏 짖다가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서슴없이 꼬리를 흔들고 손을 핥는다.
지난 9월16일 경기 파주시 '동물권행동 카라' 더봄센터에서 [시대]가 만난 진도 믹스 '설이'다. 설이는 이르면 연말 스위스로 떠난다. 직선거리로 약 8900㎞. 설이는 정말 운 좋은 개다.
넉 달 전인 지난 5월19일 설이를 처음 발견한 곳은 경기 평택시의 한 개 사육농장 뜬장(배설물을 쉽게 처리하려고 철조망을 지면에서 띄운 사육장)이었다. 당시 카라는 산책하던 시민이 찍은, 개 도살 현장이 담긴 동영상 제보를 받고 이 농장으로 달려갔다. 실제 두 줄로 늘어선 뜬장 옆에 개 도살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전기 도살봉, 털을 뽑기 위해 물을 끓이는 탕지와 탈모기, 토치가 보였다. 흙바닥에는 개털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웅덩이엔 고인 핏물이 악취를 풍겼다. 뜬장 안팎에는 개 두개골이 나뒹굴었다. 신주운 카라 정책팀장은 [시대]에 "개 농장이라기보다 공동 도축장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뜬장에서 꺼낸 개는 모두 29마리. 채 한 살이 안 된 어린 강아지들이었다. 신 팀장은 "현장에 동행한 평택시 공무원이 소유주와 연락을 시도했지만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았다. 동물보호법상 긴급격리 조치를 발동해달라고 요청하자 담당 공무원이 흔쾌히 동의해줘 구조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동물보호법 34조는 피학대동물의 소유주가 불분명하거나, 적정한 치료·보호가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지방자치단체가 해당 동물을 구조·격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구조된 사육견 29마리는 이튿날 새벽 파주에 도착했다. 설이는 그 중 한 마리다. 구조 당시 설이는 유치도 덜 자란 생후 6개월 미만 강아지였다. 사육견 중 사람을 반길 정도로 사회성이 좋은 개는 3분의 1 남짓이다. 설이는 유난히 해맑았다.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 아이라 더 크기 전에 입양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김현지 카라 사무처장의 말이다. 구조된 개들은 평택시 중재로 소유주가 소유권을 포기하면서 카라가 완전히 넘겨받은 상태다. 설이에게 찾아온 첫 번째 행운이다.
설이 입양을 서두른 이유는 국내 입양 현실에 있다. 개 농장 출신 사육견들은 도사견, 셰퍼드, 진도 믹스 같은 대형견이 대부분이다. 아파트 위주 주거 환경 탓에 국내 입양이 힘들다. 김 처장은 "보통 성견보다 한 살 미만 강아지가 입양이 잘 되지만 개 농장 출신은 그마저도 어렵다"고 했다.
국내 입양이 어려운 상황에서 해외 입양은 마지막 구명줄이다. 다행히 설이에게 두 번째 행운이 찾아왔다. 2022년 울진 산불 때 구조된 진도견 '가스파'를 입양한 스위스 제네바의 한 가족이 직장 동료 부부에게 카라를 소개한 것. 센터를 찾은 부부는 단박에 설이에게 마음을 뺏겼다. 해외 입양은 건강검진, 예방접종부터 장거리 이동 훈련, 이동봉사자 섭외까지 스무고개를 넘어야 한다. 게다가 유럽은 광견병 항체 검사를 통과한 뒤 3개월을 더 기다려야 갈 수 있다.

국내 입양이든, 해외 입양이든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임시보호'는 구조된 사육견들에게 또 다른 선택지다. 카라 더봄센터는 이미 정원의 두 배인 400마리를 보호하고 있다. 임시보호가 많아지면 그만큼 구조 여력도 커진다. 하지만 낯가림이 심한 개체, 일명 '소심이'들은 어렵게 연결된 임시보호 가정에 보내져도 적응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설이와 함께 구조된 '푸딩'이도 임시보호 가정에 보내졌지만, 가족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에만 자기 공간에서 나오는 등 불안 증세를 보여 센터로 돌아왔다.
평택 사육농장에서 구조된 29마리 중 입양이 확정된 건 설이뿐이다. 임시보호도 카라 팀장이 집으로 데려간 '토토'가 유일하다. 한 마리는 건강 악화로 숨졌다. 남은 26마리는 카라와 또 다른 동물보호 단체에서 나눠 생활하고 있다. 카라는 이들이 입양될 때까지 돌볼 생각이지만, 그들에게도 설이와 같은 행운이 찾아올지는 알 수 없다.

'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개식용종식법)은 내년 2월 시행을 앞두고 지난 3년간 유예기간을 거치고 있다. 그 사이 사육견 46만여 마리 중 44만여 마리는 출하된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애초 정부는 식용이나 안락사가 아니라 구조와 입양을 통해 사육견을 최대한 보호할 것처럼 말해왔지만, 그런 정책도 노력도 부족했다.(기사 참조: 사육견 보호한다더니 3년간 44만마리 "관행적 출하")
현재 남은 사육견은 2만여 마리. 지금까지 구조된 사육견은 극히 소수다. 설이처럼 입양을 가는 경우는 더욱 적다. 지금이라도 남은 사육견들을 어떻게 보호할지 논의해야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현재 전국 동물보호센터는 지자체 직영과 위탁을 포함해 236개소, 동시에 수용 가능한 개체수는 1만9605마리다. 현재 수용율은 75% 수준이다.
동물보호센터는 개식용종식법이 제정된 2024년 231곳에서 지난해 236곳으로 5곳이 늘어나는 데 그쳤다. 신·증축 관련 예산은 2024년 60억원, 지난해 56억원에 이어 올해는 31억원으로 점점 줄었다. 더욱이 센터 한 곳 운영에만 연간 8억~10억원이 들어가 무작정 늘리기도 쉽지 않다.
사육견 보호를 위한 별다른 준비 없이 개식용종식법 시행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사육견의 도살과 유통은 더 급박하게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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